[시민 시인의 얼굴] 한 송이 꽃에서도 천국을 보았던 호모 코트디아누스: 이병기, 「천정」
[시민 시인의 얼굴] 한 송이 꽃에서도 천국을 보았던 호모 코트디아누스: 이병기, 「천정」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7.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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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가장 가찹고 사랑스러운 조그마한 나의 하늘
매양 그 아래서 앉고 서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적연(寂然)히 눕고 싶지는 않다

현란한 매화(梅花)들이 향기 듯는 듯하고
쥐는 까만 눈으로 나를 노려도 보고
둥덩둥 하는 소리는 음악으로 들을까!

나의 천정으로 너의 운동장을 삼고
나의 뒤주를 너의 곳간으로 삼고
네 비록 쏠고 좃은 들 내 집이야 기울랴

-이병기, 「천정(天井)」

한 송이 꽃에서도 천국을 보았던 호모 코트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우리 현대 문학 요람은 <문장>지였습니다. 정지용과 이태준이 오늘날 우리 문학의 근거가 된 사람들을 시인 작가로 뽑아 내놓았습니다. 거기에 가람 이병기도 함께 했다고 말 거드는 일은 드뭅니다. 아마 시조라는 전통 장르에 비친 그림자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가람 행보를 보면 결코 고루함 속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가람은 문헌 서지학, 국어학, 고전문학, 현대문학, 구비문학, 민속학, 교육학, 역사학 등 헤아릴 수 없이 우리 것을 사랑했습니다. 오죽하면 ‘잡학’이라 혀를 내둘렀을까요. 21세기 전인적 인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면모를 한국학을 넘어 가람학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가람학은 한국학을 넘어 인간학으로 변신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 가람 시조가 구심점으로 자리합니다. 이 시는 그러한 서정과 인식을 담았습니다. 매화와 쥐와, 천정과 뒤주와 같은 일상적인 것들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표면이 아니라 깊이를 통해 새롭게 나타납니다. 자연과 짐승과 인간의 형식은 허물어져 같은 공간에 거주하고, 하늘은 외부에서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서 있으며, 천정의 넓이는 운동장 폭으로 깊어집니다. 매화는 스스로 향기를 분출하며 정적 존재에서 능동적으로 변신하고, 쥐와 사람의 관계는 대등하게 오히려 뒤바뀝니다. 집이라는 일상 공간에서 소외 없는 연대의 공동체를 이루다니.

호모(Homo)는 인간 족속의 접두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에서 시작해 호모 에렉투스로 바로 서게 되었으며 한때는 호모 데멘스 미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호모 엠파티쿠스 공감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기도 했습니다. 이젠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으로 호모 노에티쿠스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 시에서 호모 노에티쿠스로서 가람을 만납니다. 가람은 일상 속에서 진귀한 삶의 비밀을 건져낸 시인입니다. “한 송이 꽃에서도 천국을 보고 한 찰나 사이에서도 무한을 가질 줄 알아야 하며 털끝이 태산보다 크고 겨자씨 속에도 삼천세계가 있다”고 “시조는 혁신하자” 외치며 작은 것, 덧없는 것, 하찮은 것,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 절하된 것에 새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가람은 현대 일상인(日常人) ‘호모 코트디아누스(Homo quotidianus)’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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