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소프트웨어 개발자, 벤처기업가, 대학 교수, 정치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걸어온 인생을 설명하는 다섯 개의 직업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직업은 따로 있다. 바로 ‘저자’. 안철수는 무려 열다섯 권의 단독 저서를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다. 거쳐 온 직업만큼 그 분야도 다양하다. 이토록 집필 활동에 매진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미지의 세계를 접할 때마다 책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책 『안철수의 서재』(푸른영토)에 그 독서 인생이 잘 정리돼 있다.
2005년, 안철수는 자신이 창업한 안철수연구소 CEO에서 물러나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당시 안철수연구소는 다른 컴퓨터 보안 업체들이 침체기를 겪는 와중 창립 10년 만에 순이익 100억원 기업 대열에 드는 등 한창 순항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더했다. 그러고는 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그가 추천한 책 중 하나인 『프랭클린 자서전』의 주인공 벤자민 프랭클린을 연상케 하는 선택이다. 프랭클린도 40대라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 본격적인 과학 탐구에 도전했다.
이후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비롯해 놀라운 발명품들을 발명했음에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대신 설계도를 세상에 공개해 버리기도 했다. 안철수도 이와 비슷하게 의사로 일하면서 7년 동안 시간을 쪼개 만든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V3’를 전 국민에게 무료로 배포해 ‘컴퓨터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2008년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카이스트 석좌교수를 맡아 만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직업을 가벼운 마음으로 바꿨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끝까지 간 다음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뿐입니다.”
바쁜 와중에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매진할 때조차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그의 책 사랑은 유난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30분이나 되는 거리를 책을 읽으며 걸어서 통학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400권이나 되는 고전 시리즈인 ‘삼중당 문고’를 모두 섭렵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은 컴퓨터도, 취미인 바둑도 책으로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는 항상 책을 통해 먼저 그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것이 스스로 정한 원칙이었다고 한다. 바둑을 배울 때 보통 사람들이 기원부터 찾아간다면 그는 바둑 입문서를 포함해 관련 책 50권을 읽었고,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울 정도가 되어서야 기원에 나갔다고 한다. 처음에는 실전 감각이 없어서 매번 졌지만, 점차 책으로 습득한 기본기가 두각을 드러내며 불과 1년 만에 아마추어 1~2단 정도에 해당하는 실력을 쌓아 대학 기숙사 바둑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대학원 시절 읽은 『학문의 즐거움』은 이렇듯 정석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그에게 평생을 품고 갈 위안이 되었다. 필즈상을 수상한 일본의 저명한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이 책에 평범한 소년이었던 자신이 노력을 거듭한 끝에 위대한 성취를 이룬 과정을 담았다. 안철수는 이 책의 추천평에서 “어떤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면 나는 미리 남보다 두세 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자신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인도하는 듯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헤이스케가 10년 동안 ‘특이점 해소’라는 난제만을 생각하며 생활한 것처럼, 그도 7년 동안 ‘V3’이라는 문제와 함께 생활해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자만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인생 책’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를 읽으며 세상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던 세기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같은 ‘진짜 천재’들도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과거 “만일 나에게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책뿐만 아니라 파인만의 책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라며 세상의 칭송을 받으면서 자만해지려 할 때면 파인만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글도 남겼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의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은 인생의 길잡이로 책을 선택했다고 밝혀 왔다. 안철수연구소에서는 승진 평가에 경영 서적 독후감을 제출하게 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도 어디서나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다. 2020년 독서신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계속되는 독서율 하락을 우려하며, ‘독서가 한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평소 지론을 전하기도 했다.
그동안 정치인으로서 안철수의 행보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정치인이란 직업 특성상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책을 외우듯 천천히 세상에 접근하는 그의 속도가 정치판이나 민심이 바라는 바와 어긋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느리지만 화려하게 꽃 피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수많은 책으로 쌓은 인문학적 감수성이 낮은 곳까지 가 닿는 꽃향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