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축제였던 서울국제도서전이 뜨거운 논란의 불씨가 됐다. 지난 14일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한 2023 서울국제도서전은 첫날부터 수많은 관람객이 몰리며 화제를 낳는 한편, 단순 해프닝으로 볼 수 없는 정치적 소동도 몇 차례나 일어났다.
시작은 도서전 개막에 앞서 한국작가회의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를 비롯한 문화예술단체들이 코엑스 앞에서 벌인 항의 집회였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일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가담했다고 알려진 소설가 오정희의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며, 각각 도서전 주최와 후원을 맡고 있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그중에는 송경동 시인, 정보라 소설가 등 유명 문인들도 있었다.
![[사진=문화연대]](/news/photo/202306/109001_78261_4431.jpg)
오정희 소설가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제5기 위원으로 있을 당시 예술위가 청와대와 문체부로부터 특정 작가들에 대한 ‘배제 명단’을 하달받아 실제 선정 과정에 실행한 아르코문학창작기금(문학 분야 창작 지원사업) 배제 사건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운용이 가장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행된 대표적인 사례이자 강한 집행 의지가 반영된 사례로 평가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에 따르면, 오정희 소설가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하지만 백서에서는 다수의 문건과 구체적인 관계자 진술을 바탕으로 그가 “적어도 블랙리스트에 대하여 인지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오정희 소설가는 지난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문학계와 언론의 비판을 받고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14일 오전에 열린 항의 집회가 이슈가 되자 출협은 오후에 입장문을 정리해 언론에 배포했다. 이 입장문에서 출협은 “홍보대사 선정은 도서전 운영팀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의사에 따라” 진행돼 왔으며 때문에 “홍보대사의 선정에는 출협 집행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문체부에 대해서도 “후원을 받고 있을 뿐, 홍보대사 선정 과정에 전혀 관여한 바 없다”며 “홍보대사 선정 과정, 선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출협이 책임지고 성찰하고 사과하고 개선할 일이지 문화체육관광부에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출협은 이미 홍보대사가 발표된 직후부터 문화예술단체들의 항의 방문 등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미 언론에 배포된 홍보물을 완전 폐기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며 오정희 소설가가 참석하는 공개 행사 등을 전면 취소하는 등의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상 해촉이나 다름없는 조치지만 공식적인 해촉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대응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의견상 약간의 스펙트럼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문체부도, 출협도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도서전 운영팀의 입장도 들어 봐야 하겠지만 도서전 홈페이지에서는 운영팀 조직도조차 확인할 수 없다. 15일 출협에 운영팀 조직 방식과 출협 소속 직원의 비율, 구체적인 홍보대사 선정 과정, 이후 문제 대응에 대한 운영팀의 입장 등을 물었지만 “바빠서 즉각적인 확인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한편 이날 항의 집회 이후 참가자들이 도서전 개막식에 입장하려다 축사를 위해 참석한 김건희 여사의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해 끌려 나가는 일도 발생했다. 특히 송경동 시인은 6명의 경호원에게 사지째 들려 연행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 일부가 몸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단지 예술인으로서 평소처럼 개막식에 입장하려 했을 뿐 경호 구역에서 집회성 혹은 폭력적 언행을 하지 않았던 터라 ‘과잉 진압’ 논란이 불거졌다.
출협은 위의 입장문에서 “오늘 오전 개막식 행사 전에 발생한 ‘시위’에 포함된 문제 제기의 진정성이 우리 사회에 수용됨으로써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며 “관련된 분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예술인들이 개막식 출입 제한을 당한 것이나, 대통령 경호실의 진압으로 다친 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출협이 주최한 행사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할 예술인들이 개막식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입었는데 “건강과 평안을 기원한다”니, 의문이 남는 표현이다.
심지어 개막식에 출입할 수 없었던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독서신문을 포함해 출판‧문학 기자 다수가 예년 같으면 당연히 취재해야 할 개막식에서 문전박대를 당해 밖에서 대기하기도 했다. “왜 못 들어가냐”고 묻자 주최 측 관계자가 “VIP(김건희)가 오셔서 경호 문제 때문에 풀(pool) 취재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취재 제한에 대한 사전 공지나 사후 해명은 없었다.
이날 대통령실이 낸 보도자료 제목은 “김건희 여사, 국내 최대 책 축제 ‘서울국제도서전’ 방문”이었다. 모두의 축제가 되었어야 할 도서전은 ‘블랙리스트 인사 위촉’에서 ‘개막식 출입 제한 및 과잉 진압’에 이르기까지 시작부터 문화예술계를 배제하는 행보로 혼돈의 장이 됐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