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든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
병든 나라에 온 천사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 운동가 최열이 말 전해 준 이 사람은 전 생애를 도둑맞은 슬픈 청년입니다. 그는 스물다섯에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니 누군가 떠오르지 않나요. 아, 윤동주. 그렇지만 아닙니다. 안승준이라는 젊은이입니다. 그의 유고(遺稿) 때문에 다시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얼굴로 마주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묶은 책이 어느 유명 소설가의 손에 표절 유린당해서일까요. 그럼에도 그 작가가 우리 문학의 대명사처럼 아직도 추앙받고 있어서일까요. 우리는 병든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 제목 「병원」은 윤동주의 유고 시집 표제로 쓰일 뻔했습니다. 어쩌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이름으로 윤동주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시집 원고를 간직하여 우리에게 전해 준 정병욱에 따르면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 윤동주는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이라 이름 붙인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시에 등장하는 여자는 표절당한 안승준 같습니다.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습니다. “바람조차” 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 속 “늙은 의사”처럼 세상은 청년들이 겪는 병을 제대로 진단하지 않습니다. 병이 있어도 없다고 말하는 병든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하이데거가 말한 바로 그 시인입니다. 타자의 편에 서서 보이지 않으나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를 쓸 때 천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고독해지기 위해 어둠 속에 스스로를 고요히 두었을 때 천사가 찾아와 슬픔과 죽음 속에서도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이며 소중하니 사랑받아야 한다는 비밀을 전해 주었습니다. 시 「병원」에서 시인은 여자가 떠난 자리에 가 누웠습니다. 병든 사람과 온몸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김종삼 시 「엄마」에 나오는 시구처럼 “죽지 않는 계단”이 되기 위해 “지나친 시련과 피로”에도 “성내서는 안 된다”는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은 병든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윤동주의 시는 천사의 소리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