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병든 나라에 온 천사: 윤동주, 「병원」
[시민 시인의 얼굴] 병든 나라에 온 천사: 윤동주, 「병원」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5.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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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든 자리에 누워본다.

-윤동주, 「병원」

병든 나라에 온 천사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 운동가 최열이 말 전해 준 이 사람은 전 생애를 도둑맞은 슬픈 청년입니다. 그는 스물다섯에 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니 누군가 떠오르지 않나요. 아, 윤동주. 그렇지만 아닙니다. 안승준이라는 젊은이입니다. 그의 유고(遺稿) 때문에 다시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얼굴로 마주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묶은 책이 어느 유명 소설가의 손에 표절 유린당해서일까요. 그럼에도 그 작가가 우리 문학의 대명사처럼 아직도 추앙받고 있어서일까요. 우리는 병든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 제목 「병원」은 윤동주의 유고 시집 표제로 쓰일 뻔했습니다. 어쩌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이름으로 윤동주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시집 원고를 간직하여 우리에게 전해 준 정병욱에 따르면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 윤동주는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이라 이름 붙인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시에 등장하는 여자는 표절당한 안승준 같습니다.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습니다. “바람조차” 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 속 “늙은 의사”처럼 세상은 청년들이 겪는 병을 제대로 진단하지 않습니다. 병이 있어도 없다고 말하는 병든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하이데거가 말한 바로 그 시인입니다. 타자의 편에 서서 보이지 않으나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전해 주는 사람입니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를 쓸 때 천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고독해지기 위해 어둠 속에 스스로를 고요히 두었을 때 천사가 찾아와 슬픔과 죽음 속에서도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이며 소중하니 사랑받아야 한다는 비밀을 전해 주었습니다. 시 「병원」에서 시인은 여자가 떠난 자리에 가 누웠습니다. 병든 사람과 온몸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김종삼 시 「엄마」에 나오는 시구처럼 “죽지 않는 계단”이 되기 위해 “지나친 시련과 피로”에도 “성내서는 안 된다”는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은 병든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윤동주의 시는 천사의 소리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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