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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은 소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제인 에어』는 여성이 주인공인 드문 성장소설이었다. 열두어 살의 내가 그걸 읽고 글을 써보려 했던 것은 당연했다. 바로 그것이 『제인 에어』가 가진 힘이었다. 여자아이에게 독립을 꿈꾸게 하고, 다른 세상을 그리게 하고, 자기 이야기를 써볼 마음을 내게 하는 것. <27쪽>
고정희는 “민중해방이 강조되는 곳에 몰여성주의가 잠재”하고, “여성해방이 강조되는 곳에 몰역사, 탈정치성이 은폐”된 현실을 직시했고 피하지 않았다. 둘로 나뉜 전선을 하나로 아우르는 미션에 도전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홀로 감당했다. 그는 여성과 남성, 농촌과 서울, 민중과 지식인으로 나뉜 세상에 있었으나 어느 한쪽에 속하는 대신 이 모든 경계를 살았다. <82쪽>
김명순은 일본어ㆍ영어ㆍ독일어에 능통한 언어적 재능을 바탕으로 성폭행의 참혹을 견디며 시와 소설에서 자신의 언어를 구축했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를 국내에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번역했으며, 그리스 신화와 니카라과의 국민 시인 루벤 다리오의 시를 인용해 조선 문단을 자극했다. 그리고 창작시와 번역시를 모아 1925년에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했다. 여성 작가로는 최초였고 남성 작가들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드문 성취에 대한 응답은 지독히 악의적이었다. 김기진·김동인·방정환 등이 문학의 이름으로 퍼부은 언어의 저열함은 놀랍기 그지없어, 작가로서는 물론이요 인간으로서의 자질조차 의심케 한다. 그러나 남성 문인들의 집요한 돌팔매질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나쁜 피’를 운운하며 거짓 소문으로 2차 가해를 가하는 이들에 맞서, 김명순은 직접 자기 삶을 이야기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썼다. 여성 스스로 성폭행을 공론화한 최초의 사례였다. <87쪽>
남성이 작정하고 여성을 배제하거나 괴롭혀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냥 남성이 인간 사회의 기본값이어서다. 그 세상에서 여성 구조대원은 몸에 맞지 않는 남성용 안전장비와 씨름하다 목숨을 잃고, 쓰나미로 피해 입은 난민을 돕겠다고 나선 활동가들은 연료 없이 식재료만 주거나 부엌 없는 집을 지어줘 난민들의 배를 두 번 곯린다. 이 황당한 사태에 고의나 저의는 없다. 단지 여성과 함께 일하지 않고,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여성에게 의견을 묻고 이야기를 듣는 당연한 과정을 밟지 않아서 생긴 일일 뿐이다. <118쪽>
[정리=장서진 기자]
『일 년 내내 여자의 문장만 읽기로 했다』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펴냄 | 432쪽 | 18,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