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프루스트의 기억법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프루스트의 기억법
  • 스미레
  • 승인 2023.05.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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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오래된 꿈 중엔 ‘타임머신 갖기’라는 것이 있다. 심지어 에디터님께 ‘여긴 궁서체로요’ 부탁을 드려야 할 만큼 제법 진지한 소망이다. 생일이면 뭘 갖고 싶냐는 남편에게 다른 건 이만 되었으니 타임머신 하나만 만들어 줘어, 생떼를 부린다. 실현 불가란 말을 모르는 사람처럼, 어쩌면 외계인을 믿는 어린애처럼 여전히 그 꿈을 꾼다.

프루스트의 작품에 자석처럼 끌리는 사람들, 일명 ‘프루스티안(proustians)’들은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어떤 이미지나 냄새, 맛 등이 과거를 되살린다는 걸 막 알아가던 시절에 감각과 경험을 ‘기억’으로 풍성하게 엮어낸 프루스트에게 매료되었다. 그 무렵 영화 <마르셀의 여름>을 본 것 또한 우연은 아니었겠다. 그때 내겐 마르셀이란 이름과 여름은 곧 ‘프루스트’란 한 단어로 수렴되곤 했으니까. 물론 영화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아닌 프랑스의 또 다른 위대한 작가, 마르셀 ‘파뇰’의 이야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프루스트와 파뇰은 같은 시대를 겪었으나 전혀 다른 생을 살았다는 것도. 그러나 작가인 둘에겐 닮은 구석이 있었으니, 조각난 기억들을 섬세한 오감을 통해 멋진 파노라마로 펼쳐냈다는 점에서 그랬다.

영화 속 마르셀은 어린 시절 가족과 산속에서 보낸 여름 방학을 회상한다.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이자, 어른이 된 그에게 무한한 영감이 되어줄 여름이었다.

계절의 기별만큼 오감을 달싹이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침이면 별장의 창문을 먼저 열겠다고 앞다투어 달리던 마르셀 형제의 마음이 내게 멀지 않다. 생명이 와글와글 자라나는 때, 창가에 서는 건 매일 반복해도 그저 벅차기만 한 일. 창이 열리며 펼쳐지는 푸른 산, 파도처럼 밀려드는 매미 소리, 미풍에 실려 오는 풀 냄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안에 씨앗을 내리고 자라 언젠가 반드시 피어날 것들은 대개 이러하다. 사소하지만 분명하고 영원할 것만 같아 더욱 애틋하다. 파뇰의 여름 산이나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지나간 시간에 속해있지만 바로 지금으로서 환하게 되살아나곤 하는 것들.

사푼사푼. 올해도 봄은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걸어왔다. 시절이 하 수상해도 봄은 봄인지라, 부엌 창으로는 연신 아카시아 향과 뻐꾸기 소리가 넘어온다. 저녁나절 비단결 같은 바람에 땀을 말리며 앉아있던 아이가 그런다. "아, 냄새 좋다. 우리 여기서 뻐꾸기 소리 들으면서 부침개도 해 먹고 그랬잖아요. 그때 엄마가 이게 아카시아 냄새라고 알려줬어. 저건 뻐꾸기 소리고."

그해는 숲으로 이사한 첫해였다. 처음 겪어보는 소리와 냄새. 대체 이것들이 다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건지 아이는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나 보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과일을 깎거나 요리책을 뒤채다 별 표정도 없이 한 마디씩 해줬던 걸 여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순간 내가 아이에게 계절을 가르쳤구나, 하는 뿌듯한 감격이 들었다. 계절은 언제나 돌아올 것이고 아이의 노트엔 계절마다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힐 터이며, 그중 몇몇은 아이 평생에 특별한 것으로 간직될 것이다. 그런 계절에 대한 첫 기억을 연 사람이 나라니. 그게 그리 좋아서 손톱 밑이 다 저릿저릿해 올 정도였다.

시절은 아이를 닮아 빠르게 자라고 계절은 끝없이 순환한다. 그러니 계절마다 그와 함께 오는 고운 기억이 많은 사람은 얼마나 부요한 사람인가. 시간이 흘러도 뻐꾸기 울고 아카시아 향이 코끝에 스칠 때면 아이는 여기를 떠올리겠지. 숲을 곁에 두고 살아서 다행이란 생각이야 매일 하지만 이날은 유독 그랬다. 나중에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도 봄이면 저들은 어김없이 돌아와 아이 곁에 있어 줄 테니까.

오늘 아이는 땅에서 수박 냄새가 난다며 여름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촉촉한 대기에서 따뜻한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났다. 아이의 훗날, 오월의 산 냄새는 아이를 이리로 데려올 테지. 생각하며 창가에 섰다. 아이와 함께 바라보는 계절은 언제나 찬란하고 추억은 힘이 세다.

매일매일. 추억할 땅이 더 넓어지기에 나는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간다. 사방이 모두 낮게 낮게 가라앉아 고요하기만 할 어느 날. 새봄의 잎새처럼 파릇파릇 돋아날 오늘의 바람, 어제의 구름, 내일의 햇살. 이 모두와 웃으며 마주하게 될 그날을 떠올리며 가만 미소 지어본다.

때로는 궁금하다. 어느 계절이 오면 너에게도 그때의 우리가 찾아올는지. 네가 아직 동그란 뺨을 한 아이였고 내가 젊고 미숙한 엄마였던 그 푸른 날들이.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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