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산으로 간 사람: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민 시인의 얼굴] 산으로 간 사람: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5.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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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산으로 간 사람

한때 우리는 광장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뒤엎을 만큼 뜨겁게 타오르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워지면 광장은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함께 불렀던 노래도 높이 울려 퍼졌던 함성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 산으로 갔어요 / 그리움은 회올려 / 하늘에 불붙도록. / 뼈섬은 썩어 / 꽃죽 널리도록”(신동엽, 「진달래 산천」 中)이라는 시처럼 참담한 광장을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는 광장 속에서 빛나지 않았습니다. 아프기도 하며 부끄럽기도 하여 어디론가 사라진 시가 아직도 깊은 산속 어딘가에서 눈을 밝히고 있습니다.

백석 시편은 고향에 묻어둔 이야기입니다. 쉽게는 돌아갈 수 없는 장소로 언제든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저 먼 북쪽 나라에서 들리는 눈 내리는 소리입니다. 눈은 벌판에 내려 짓밟히지만 숨은 산속 눈은 높고 외롭고 쓸쓸할 뿐입니다. 아무도 어쩌지 못할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렇게 이 시는 백석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그가 사랑하는 ‘나타샤’는 연인 ‘자야’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타샤가 아름다운 건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타샤의 마음 씀씀이 때문입니다. “책 같은 건 버리고 어서 부상병을 태워요”. 나직하게 속삭이는 아름다움 옆에 흰 당나귀가 있었을 겁니다.

북으로 간 백석을 한 장 사진 속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모던 보이였던 그가 초라한 얼굴로 다가섰습니다. 여든여섯 나이에 양치기를 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남쪽에 사는 우리들이 그를 측은히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가 산으로 가고자 했던 심중 뜻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백석은 어느 문학 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시인입니다. 아직도 광장을 배회하며 헛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으로서 그를 함부로 동정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나타샤”가 그를 “사랑하고” 곁에서 “흰 당나귀도” “좋아서 응앙 응앙 울”고 있고 언제나 “눈은 푹푹 나리고” 있으니.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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