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나의 첫 영화 <성덕>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주목을 받았다.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매일 실감 나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꿈에 그리던 순간들이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것 같아서,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었다. 몸 역시 시간이 부족했던 건 마찬가지다. 편집과 후반작업을 마치자마자 상영본을 전달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영화제가 시작되었으니. 그런데 어쩌겠나. 준비되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했다. 개인적인 경험이 소재가 된 다큐멘터리 영화의 특성상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기에 여기저기에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도 찍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매일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 사진과 각종 행사 사진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말 많이 쪘구나.”
좋아하던 연예인이 성범죄자가 된 후 혼란에 빠진 팬들의 모습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성덕>은 독립영화계가 한층 더 어려워졌던 코로나 시기에도 1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화제작이다. 이어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은 『성덕일기』가 출간됐고, 그렇게 대학 재학 중 감독이자 작가로 데뷔한 오세연(24)은 인터뷰와 행사, 방송 등을 통해 종횡무진으로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창작자의 팬을 자처하며, 다음 행보를 궁금해했다.
다음 행선지는, 조금은 생뚱맞게도 ‘단식원’이었다. 밀리의 서재에서 연재된 전자책 『지금 굶으러 갑니다』는 15일간의 단식원 체험기를 담은 에세이다. ‘찍는 사람’으로만 살다 갑자기 ‘찍히는 사람’이 된 저자는 미디어에 나온 자신을 보며 내심 속상했다고 고백한다.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진솔한 경험을 나누던 그가 한편으론 콤플렉스인 ‘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까운 친구들조차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평소 외모지상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겉모습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쿨한’ 태도로 일관하고, 다이어트를 할 때도 오로지 건강상의 이유라고 둘러대 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좀 더 솔직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살을 빼기 위해 찾아간 단식원이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도 특유의 ‘솔직함’은 힘이 셌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독립서점 ‘로우북스’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한 독자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다이어트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이날 작은 서점에 모인 독자들은 각자 몸에 대해 품어 온 복잡한 감정들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풀어 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책에서 읽은, 단식원 ‘S언니’와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장면이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 살면서 몸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날이 더워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커다랗고 하얀 무 같은 다리를 드러내는 게 싫고, 허벅지 살이 지들끼리 달라붙는 것도 싫었다. 언제나 발목까지 오는 긴 바지와 긴 치마를 고집하는 건, 사실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나의 몸. 그런 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뭐 이런 것들 앞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언니는 살이 찐 후 애인과의 관계가 변했다고 말했다. 나는 살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슬퍼했다. 그 뒤로도 몸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 굶으러 갑니다』 中
북토크 전, 오세연 작가와 잠시 마주 앉아 이번 책의 뒷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었다.
Q. <성덕>으로 큰 관심을 받은 만큼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도 컸을 것 같은데, 『지금 굶으러 갑니다』는 작가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이전에 잘 다뤄지지 않은 경험을 주제로 다큐멘터리 영화와 책을 냈더니 ‘정말 솔직하다’는 평가를 듣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어요. 어떤 것은 말하고, 어떤 것은 말하지 않았다는 걸 저는 아니까요. 물론 작품을 위한 취사선택이었지만 ‘너무 솔직하지 못했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죠. 이번 책은 어려서부터 콤플렉스로 여긴 ‘살’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이제는 ‘솔직하다’는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어요.”
Q. 차기작을 내놓는 데 두려움은 없었나요.
“두려움은 항상 있었고 지금도 조금 있지만, ‘성덕’의 성공을 너무 의식하지는 않으려 해요. 작년까지 영화와 책을 연달아 내고, 관련 행사들까지 끝내 놓고 했던 고민이 ‘이 작품이랑 어떻게 헤어지지’였어요. 뭔가 또 다음 것, 새로운 것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러다 변영주 감독님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너무 멀리 도망치려 하지 마’. 제 속마음을 읽으신 것처럼요. 한참 먼저 비슷한 경험을 해 보신 분께 그런 말을 들으니까 무척 와닿았고, 그날 이후로 마음이 편해졌어요. 저는 아직 어리니까 당분간은 재밌는 일들을 하면서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Q. 단식원 체험기라는 소재가 독특한데, 연재는 어떻게 결정된 건가요?
“처음부터 책을 내려고 단식원행을 결정한 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 편집자님이 『성덕일기』를 같이 작업했던 분인데, 편집자님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주에 단식원 가요’ 했더니 그걸로 책 작업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특별한 공간이니 뭔가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런 제안을 해 주셨어요.”
Q. 갑작스레 미디어 노출이 많아지면서 살이 쪘다는 걸 의식하게 된 것 같은데, 꼭 그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보여지는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죠.
“맞아요. 요새는 SNS를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잖아요. 저도 누구를 만나면 휴대폰 번호가 아니라 ‘인스타 하세요?’부터 묻게 되는데요. 소위 인스타그램 문화의 발달로 일상을 전시하는 게 익숙해지면서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도하게 소비를 한다든지, 외적인 부분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도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Q. 연재를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SNS를 활발하게 하는 편이라 밀리의 서재 내 리뷰 외에도 지인들이나 기존에 다른 작품으로 저를 알게 된 독자분들의 연락을 꽤 받았어요. 연재 형식이다 보니 ‘다음 편을 기다리기가 힘들다’ 이런 반응도 많았고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나도 단식원과 비슷한 다이어트 캠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부모님한테밖에 얘기를 못 했었다. 이 글을 보고 나니까 남들에게 밝힐 용기가 생겼다’는 말이었어요. 제 글로 인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고, 부끄러워하던 것을 덜 부끄러워하게 된다면 감사한 일이에요.”
Q. 말씀해 주신 것처럼 단식원이 보편적이고 친근하게 여겨지는 공간은 아닌데, 실제로 경험해 보니 어땠나요?
“사실 저도 필요해서 등록은 했지만,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단식원의 존재 자체를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결정판처럼 생각하기도 했죠. 혹시나 가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요. 막상 가 보니까 사람들이 단식원을 찾는 이유가 꼭 미용 목적만이 아니라 정말 다양해서 신기했어요. 무릎 수술을 하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살을 빼라고 권유했다는 분도 있었고, 몸에서 나쁜 것들을 비워 낸다는 개념으로 오는 분도 있었고요. 단식을 이어 가는 건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과 몸을 바라보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됐어요.”
Q. 그렇다면 추후 단식원에 다시 가 볼 의향도 있으신가요?
“있어요. 거기서 만난 분들에게 특색 있는 단식원 여러 곳을 추천받았는데, 정말 살을 빼야 할 때 가기 좋은 단식원이 있는가 하면 좀 힐링하고 싶을 때 갈 만한 단식원도 있다고 해요. 제주도에 있는 한 단식원은 아예 펜션처럼 돼 있어서 가족 단위로도 즐겨 찾는대요.”
Q. 단식원이라는 환경이 집필에도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하루에 두 번,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봉고차를 타고 나가면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 풍경이 펼쳐져요. 그 속에서 산책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건 좋았어요. 그런데 제 경우엔 단식원에서 집필 행위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글을 쓸 때 계속 장소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자극을 받아야 집중이 잘 되는 편인데, 집필할 만한 공간이 한정돼 있으니까 약간 답답했어요. 다행히 생각보다 자유도가 높아서 중간중간 외출도 하고, 친해진 사람들과 지하에 있는 노래방에 가 보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흥미로운 요소를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Q. (인터뷰 당시 총 12화 중 9화만 공개된 상태였다.)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났나요.
“이야기의 결말은… 지금의 제 모습입니다(웃음). 원래 목표는 10kg 정도 감량하기였는데 그건 실패했지만 괜찮아요. 항상 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 척하다가 사실은 외적인 모습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걸 고백하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요. 역설적으로 단식원에 가서는 내면을 더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요. 우리의 몸은 수년간의 생활이 축적된 결과물이잖아요. 제 몸 역시 항상 밤낮을 바꿔 살고, 배달 음식 먹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그런 습관이 쌓여 만들어졌는데 다 뭉뚱그려서 ‘단식원에 가서 해결하자’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단식원도 좋지만 평소 생활 속에서부터 꾸준히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닫고 돌아왔어요.”
Q.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살이 찌기 쉬운 시대라고 생각해요. 현대인의 식사가 삼시 세끼 밥에 된장찌개 먹던 시절과는 달리 굉장히 고열량의,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들뿐이잖아요. 업무나 학업 때문에 앉아 있는 시간이 자는 시간보다 길 때도 있고요. 그러니까 살이 찌는 게 꼭 개인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 와중에도 자기 관리를 잘 할 수 있다면 대단하고 멋지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된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건강은 챙기려고 노력하되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든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Q. <성덕>도, 이번 작품도 특히 여성들에게 큰 공감을 얻을 만한 이야기인데, 창작자로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여성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고, 그래서 좋습니다.”
Q. 최근 새로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가 있으신가요?
“로맨스를 써 보려고 해요.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단편영화가 될 수도 있고요. 로맨스는 늘 저와는 멀리 있는 거라고 여겼는데, 제가 로맨스를 쓴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그냥 한번 시도해 보려고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굶으러 갑니다』가 6주에 걸쳐서 공개되었잖아요. 그 기간 동안 뭔가를 이어서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인데, 일주일에 두 번 감칠맛 나게 공개되는 글을 끝까지 기다려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단식원에 들어가기로 한 건 저의 새해 다짐이었어요. 독자분들도 다가오는 여름을 맞아 몸의 변화를 위한 어떤 다짐을 하실 텐데, 그럴 때 생각나는 글이었으면 합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