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보여준 ‘음악의 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보여준 ‘음악의 힘’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4.19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지난달 28일, 세계적인 영화음악의 거장이자 전자음악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사카모토 류이치가 암 투병 끝에 향년 71세로 우리 곁을 떠났다. 투병 사실을 알고 있던 팬들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지만, 죽음은 언제나 낯설게 다가오는 법이다. 투병 중에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작업을 계속해 지난 1월 6년 만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개봉을 앞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몬스터> OST에도 참여한 그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추모의 물결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던 그의 자서전이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됐다.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청미래).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일본 잡지 <엔진(ENGINE)>과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그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음악 세계를 직접 반추한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다. 57세에 출간한 책이라 말년의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으나 그만큼 ‘거장’의 초년기 일화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작곡을 처음 경험한 건 유치원 때였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돌아가며 토끼를 돌본 경험을 소재로 노래를 만드는 숙제가 있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노랫말을 만들고 멜로디를 붙인 자작 악보를 완성했다. 아주 어릴 때였지만, “실제로 손가락을 물리고 똥을 치워주면서 내가 접했던 토끼와는 완전히 다른 뭔가가 생겼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위화감과 “근질거리는 듯한 기쁨. 다른 누구의 것과도 다른 나만의 것을 얻었다는 감각”을 동시에 느꼈다.

이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평생 고민해 온 ‘음악의 한계’이자 ‘음악의 힘’이다. 실제로 겪거나 느낀 것을 표현한다고 해도,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시점부터 음악 세계의 소유가 되어버려서” 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 대신 음악은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고, 개인의 기억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민족이나 세대의 공유물로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

‘바흐, 드뷔시, 비틀즈, 롤링스톤스’. 그의 음악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음악가들이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 멜로디와 왼손 반주로 이뤄진 대부분의 피아노곡에 불만이 있었는데, 바흐의 곡은 오른손과 왼손이 역할을 계속해서 바꾸며 진행돼 마음을 끌었다. 작곡 공부를 막 시작한 중학교 무렵 접한 비틀즈와 롤링스톤스는 클래식뿐 아니라 다양한 음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비틀즈의 하모니에서 드뷔시의 ‘9th 화음’을 발견하고 흥분했다는 일화도 있다.

고등학교 때는 처음으로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장 뤽 고다르, 오에 겐자부로, 존 케이지 등 전위적인 현대 예술을 장르 구분 없이 섭렵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그런 의식이 내 음악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한참 더 나중의 일이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나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고 회고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쓴 채 빗소리를 수집하고, 쓰나미로 인해 휘어지고 끊어진 피아노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간 소리”가 난다며 진지하게 연주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시절은 개인적으로도 ‘해체의 시대’였다. 1969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당시 학교의 제도에 반발해 일어난 수업 거부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학생 중 하나였다. 시험을 강행하려는 선생님이 있으면 답안지를 찢어 버리고, 4주 동안이나 학생들끼리 국제정세나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수업을 대체했다고 한다.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학교 안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헬멧을 쓴 채 드뷔시를 연주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틸컷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은 대학 시절의 학생운동을 거쳐 말년의 행보로까지 이어졌다. 삼림 보호 단체 ‘모어 트리즈’와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지원하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했고, 투병 중에도 탈핵과 평화, 환경 운동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20만년 인류 역사 동안 예술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희망으로 꼽았던 그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 사카모토 류이치가 생전 좋아했다는 문장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가 장르를 넘나들며 이룩한 빛나는 음악적 성취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예술의 힘으로 했던 일들은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