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미술관』 저자 탁현규 미술사학자 “전통미술엔 ‘쌀밥’ 같은 매력 있죠”
『조선 미술관』 저자 탁현규 미술사학자 “전통미술엔 ‘쌀밥’ 같은 매력 있죠”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4.07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선, ‘사문탈사(寺門脫蓑)’. 왼쪽은 66세, 오른쪽은 80세에 그린 그림을 부분 확대한 것이다. [사진=간송미술관]

겸재 정선(1676~1759) 하면 떠오르는 것은? 진경산수(眞景山水).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를 그린 정선은 중국식 산수화의 틀을 벗어나 조선의 산천 풍경을 조선답게 묘사한 진경산수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정선은 진경풍속(眞景風俗)의 시초이기도 했다.

정선은 ‘눈 내린 어느 날 율곡 이이 선생이 소를 타고 절에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시기를 달리해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사문탈사(寺門脫蓑,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라는 제목의 풍속화다. 66세와 80세에 그린 ‘사문탈사’를 비교해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풍의 변화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변화는 율곡이 탄 소가 중국 물소에서 실제 율곡이 탔을 법한 조선 황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산수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것을 모방하던 단계를 넘어, 조선만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 풍속화를 진경풍속이라 한다.

17~18세기는 이처럼 조선의 고유색이 확립된 ‘문화 절정기’였다. 최근 주요 서점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조선 미술관』(블랙피쉬)은 이 시기에 주목해, 그림 속 인물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때로는 드라마처럼,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술술 풀어낸 책이다. 서양미술 입문서로는 흔한 형식이지만, 대상이 전통미술이 되니 색다르다. 저자 탁현규 미술사학자는 15년간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일하며 ‘고미술계 최고의 해설가’로 불렸던 바 있다. 볼거리가 가득한 오늘날 독자들을 사로잡은 전통미술의 매력에 관해 자세히 듣고 싶어, 지난달 27일 그를 만났다.

[사진=안경선 PD]

Q. 『조선 미술관』이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체감하기에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전통미술은 처음 접했는데 생각보다 재밌다’라는 평이 대부분이더군요.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해설해 주는 책이 더 많이 나와야겠다 싶어요. 지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다 서양문화의 세례를 흠뻑 받지 않았습니까. 미술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이 다 그래요.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곧 서구화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죠. 그런데 남의 것만 열심히 하면 재미가 없어요.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 사람들에게는 인상파가 그린 파리 그림이 제일 좋은 그림이에요. 항상 지나다니면서 보던 그 거리니까. 그게 우리한테는 인왕산, 북악산, 경희궁인 거죠. 물론 지금은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정서적으로 멀어졌습니다만, 그 친근함을 회복하면 우리 것이 더 재미있어요. 요즘 젊은이들이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듯이 말이죠.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북돋울 때인데, 이번 책이 좋은 반응을 얻은 건 그런 흐름을 탄 것 같아요.”

Q. 조선 역사 500년 중에서도 특별히 17~18세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악 연주자들은 모차르트, 베토벤을 평생 연주하지요? 그처럼 좋은 작품이 할 이야기도 많아요. 미술사에서는 조선 최고의 시기로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풍요롭던 시절인 17~18세기를 꼽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500년 동안 조선 사람들의 의식주나 생각이 계속 똑같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국가도 사람처럼 흥망성쇠를 겪는데, 조선이 쇠퇴하기 전 가장 아름다웠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기가 바로 이때예요. 이 사실을 대학교 재학 중이던 1991년 간송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다가 체감했어요. 그림은 각 시대의 문화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속일 수 없는 사료라고 하는데, 실제로 똑같은 사슴을 그렸어도 시대에 따라 기운생동이 하늘과 땅 차이인 거예요. 호랑이도 그래요. 18세기 그림 속 호랑이는 잘생기고 힘이 넘치는 반면, 나라가 기울어 갈 때 그려진 호랑이들은 벌써 기운이 빠져 있죠.”

Q. 이번 책을 쓰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책이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를 다룬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2부를 좀 더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풍속화가 드라마 같다면, 궁중기록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성격이라 감상하는 데 약간의 인내심과 사전지식이 필요해요. 그동안 공개된 적도 많지 않고, 그에 대해 쓴 사람도 많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으니까 더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2부를 넣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어요. 왕조 국가에서 문화예술의 핵심은 왕실이거든요. 1부에 실린 평민 풍속화들도 그 목적은 왕이나 사대부들의 감상용이었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어떻게 보면 통치 교과서예요. 옛날 상류층들은, 특히 왕의 경우 지금처럼 민생 시찰을 자주 할 수 없으니까 화가들이 그려 준 풍속화로 백성들의 삶을 공부하곤 했죠. 그런가 하면 궁중기록화는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이 집약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어요. 낯선 내용이라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써 보려고 노력했는데, ‘2부가 더 새롭고 재밌더라’는 반응도 있어서 보람도 느낍니다.”

신윤복, ‘기방무사(妓房無事)’ [사진=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Q. 그 당시 그림들이 사실적이라도 결국 상류층을 위해 그려졌다고 하셨는데, 상류층의 유흥 문화를 풍자한 신윤복의 ‘기방무사(妓房無事)’ 같은 그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그림이 포함된 화첩은 신윤복이 자신의 후원자에게 그려 준 것으로 추정돼요. ‘기방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제목은 반어법으로, 기방에 무슨 일이 있기는 하지만 늘 일어나는 일이라는 뜻이에요. 당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횡행했지만 원칙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퇴폐적인 기방 문화를 적나라하게 포착한 그림인데, 이건 개인 소장용이기 때문에 가능해요. 임금에게 그려 주는 화첩이었으면 절대로 그렇게는 그리지 못했을 거예요. 일반적인 풍속화가 오늘날의 드라마라면 이런 그림은 넷플릭스의 19금 시리즈나 마찬가지죠. 문화 절정기는 항상 사치와 향락, 퇴폐의 씨앗을 품고 있게 마련이니까요.”

Q. 미술관 연구원으로 오래 일하셨는데, 전시가 아닌 책을 통해 미술 작품을 감상해도 된다고 보시나요?

“최근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는 영상을 활용한 멀티미디어 전시 연출이 대세예요. 영상의 시대니까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이 작품과 교감하기보다는 현란한 영상만 보다 돌아가니까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또 전시장에서는 작은 그림을 세세한 부분까지 들여다보기 힘들 때도 있죠. 이 책에 실린 많은 그림들도 원본을 보면 이보다 흐릿하고 작은데, 선명하게 확대한 거예요. 클로즈업 샷을 따로 실어 놓기도 했고요. 물론 작품은 원본으로 감상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만,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을 채워 줄 만한 보완재로 책을 추천해요. 저도 전시를 보면 도록을 꼭 사 옵니다. 작품을 한 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 주거든요.”

Q. 전통미술에 흥미를 느껴 더 공부해 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있다면…

“스승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저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한 권을 꼽자면 『겸재 정선』(전 3권, 현암사), 한국 미술사의 바이블 같은 책이에요. 조금 더 쉽게 쓰신 책들도 있는데 그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 있어 이 책만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진=안경선 PD]

Q. 마지막으로, 서양미술을 더 친근하게 느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미술만의 매력을 설명해 준다면.

“한마디로 말하면 친근함이에요. 저도 예전에는 서양미술이 좋았어요. 더 화려하고 스펙터클해 보이니까요. 그런데 한번 전통미술의 맛을 보니까 이 맛이 참 은근하게 진득하게 오래 가요. 서양미술이 피자라면 전통미술은 쌀밥 같다고나 할까요. 피자가 맛있지만 매일은 못 먹는데, 쌀밥은 50년 동안 먹어도 안 질리잖아요. 그런 맥락으로 접근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무조건 우리 것만 좋아하고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가깝고 친근한 미술부터 향유하자는 거죠. 사실 ‘전통미술의 매력은 이거다’라고 주입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아요. 책 속에 전통미술의 매력을 담으려고 노력했으니, 찬찬히 읽으면서 스스로 느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