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다정도 병이라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다정도 병이라
  • 스미레
  • 승인 2023.03.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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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참 오래도 본다. 메리 커셋의 그림들 말이다. 더 좁게는 보송한 파스텔 필치로 아기와 엄마를 그린 그의 후기 작품들을 나는 오래도록 좋아해 왔다. 차분히 바라보노라면 순간의 온기, 향, 대화 같은 것들이 느껴진달까. 마음이 푹해져서랄까. 아마 모두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보는 순간 행복해지는 그림들이라고.

그림 속 엄마들의 표정을 되돌아본 건 최근의 일이다. 모두가 씻긴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림이 밝고 포근하니까, 그 안의 그녀들 역시 환하게 웃고 있으리란 막연한 단정을 이제야 바로잡았다. 그림 속 그들은 다만 ‘육아’라는 일을 담담히 해내는 생활인 같다. 후광 찬란한 성모도 가련한 희생양도 아닌 그저 거기 한 사람. 아이를 돌보는 일에 대해 어떤 편견이나 감정도 충동하지 않는 그 모습이 내겐 오히려 조촐한 위안이었다.

커셋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다. 인상파 화가들이 이젤을 들고 나가 자연의 빛을 탐하던 때이자 상징주의와 유미주의, 데카당스가 꽃피던 때다. 고흐가 불타는 해바라기를, 마네가 벌거벗은 올랭피아를, 피카소가 압도적인 스케일의 추상화를 그리던 시기. 그러나 어떤 화가들의 눈에는 집안의 그녀들이 가장 아름다웠다.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우유를 먹이는 사람들. 그네들이 매일매일 닦아 나가는 소박한 일상도 예술이 됨직해 보였다. 커셋의 눈에도 그랬다. 여성 해방을 외치며 결혼 대신 직업 화가의 길을 택한 그이지만, 훗날 언니의 삶에서 ‘엄마’란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작고도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해 많은 작품을 남겼었다.

천재(天才)를 지닌 그와 달리 평범한, 게다가 아이를 축복으로 받은 자에게도 모성은 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모성이 꼭 유감스러운 ‘희생정신’만은 아님을 나는 또한 커셋의 그림에서 본다. 어떤 위로도 동정도 필요치 않다는 작약함, 엄마 된 한 인간에게서 우러나는 따스한 품위를 그의 그림에서 느꼈을 때. 나는 곁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꽃을 이제 본 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물론 체온을 지니고 오늘을 사는 나는 그림 속 그들과는 달라서 매일 다양한 감정의 사태를 겪곤 한다. 어리숙한 성정마저 엄마가 되어 더욱 유난이다. 나를 돌보는 일엔 그만큼 더 의식적인 품이 든다. 온통 ‘나, 나, 나’를 외치는 세상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따라잡질 못한다. 일도 육아도 잘하기로 소문난 누구는 모질단 소릴 들을 만큼 자신을 먼저 챙기는 게 그 비결이라던데. 뜨끔함에 귀밑이 빨개져도 그때뿐. 육아서를 읽을 때마다 가장 귀찮은 숙제로 남는 건 엄마 자신을 돌보란 말이었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아이가 눈에 밟혀 자신을 챙기는 건 자꾸 뒤로 밀린다. 아이의 귀여움에 넋을 놓고 닳아가는 건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그러다 이왕 하는 일 즐겁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너무 피곤할 때, 그러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놀라서는 그랬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아끼는 향초를 지피고. 창가에 수채화처럼 번진 숲을 바라보며 그 안에 사는 고라니며 청설모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전이었다면 마냥 흘려졌을 이런 순간들이 이제는 팬케이크에 시럽 스미듯 삶에 스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런 후엔 좀 더 보드랍고 촘촘한, 육아하기 좋은 마음이 됐음에 감사했다.

여전히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소란하면 소란한 대로, 평온하면 평온한 대로 보살피고 염려하고 환호하며 매일을 지난다. 이불을 덮어주고도 춥지 않을까 이불을 당겨 주고, 아침을 못 먹어 속이 허하진 않을까, 우유 잔을 들고 쫓기도 하며. 어디다 얘기라도 하면 ‘대체 왜?’ 하는 눈빛을 돌려받곤 하는 일들과 아이조차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그런 일들에 참 무던히도 애를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루를 건너는 길목 중간중간 마음속에서 따스한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생애 가장 정직하고 묵묵한 시간을 살아내고 있을 자신에 대한 경애와 애착. 그건 내 안에 숨어있던 ‘나를 향한 다정’이었다.

커셋이 포착한 여인들의 담담한 표정이 문득 이해가 갔다.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억지도 아니고 마지못한 것도 아니며, 그저 자연스러운 행위다. 사랑하는 이에겐 주고만 싶다.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무엇에 기뻐하는지를 자꾸 살피게 된다. 그리하여 알맞은 지점에서 시간이나 정성처럼, 내게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마음. 내가 오래도록 행복이라 불러온 그 마음을 누군가 미욱하고 부질없는 것이라 부칠 때면 응당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외로워졌다.

어쩌면 한동안 알게 모르게 강요받고 또 스스로도 은근슬쩍 동참했던 메시지. ‘자존감’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무한 긍정하고 세상의 중심으로 대접하라는 그 메시지에 지쳐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자아도취와 닮은꼴이 된 자존감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치유책으로 군림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엔 분명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안락함’. 그런 것도 있을 터였다. 그토록 완강히 편애하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본능적인 내 충동과 욕망을 이기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을 지어가는 것. 누군가에게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 그 안의 생명이 위협이나 근심 모르고 자라게 한다는 것. 그리하여 제 몸뿐 아니라 꿈도 불릴 수 있게 돕는다는 것. 그 자체로 얼마나 용감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알게 된다면 내가 들인 다정도 미욱한 수고만은 아닐 테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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