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독서] ‘국민 배우’ 김혜자의 처음에는 ‘책’이 있었다
[리더의 독서] ‘국민 배우’ 김혜자의 처음에는 ‘책’이 있었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3.06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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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의 스크린 데뷔작 <만추>(1982) 스틸컷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김혜자(81). ‘연극계의 신데렐라’에서 <전원일기>, <엄마가 뿔났다>, <우리들의 블루스> 등 100여편의 드라마와 <만추>, <마요네즈>, <마더> 등의 영화까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배역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최근 자신의 60년 연기 일생을 돌아보는 책 『생에 감사해』(수오서재)를 펴냈다. 국민 배우라는 명성과 편안한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치열한 분투와 고뇌의 흔적을 만나 볼 수 있는 기록이다.

김혜자의 ‘생’은 그의 연기만큼이나 다양한 곡절을 간직하고 있으나, 좋은 배우가 되는 데 튼튼한 뿌리가 되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지금 우리는 배우가 아닌 김혜자를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나섰을 땐 주변에서 모두 미쳤다며 반대했다. 또 내심 “여배우 하면 우선 미인이어야 한다는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실망시킬까 봐” 걱정을 품기도 했단다. 그때 단 한 사람, 아버지만이 그의 꿈을 존중하며 다음과 같은 조언을 건넸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찰리 채플린을 봐라. 웃기는 짓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아니? 좋은 배우가 되거라. 좋은 배우가 되면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세상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라.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라.”

1962년,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해 연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김혜자는 열정은 가득하지만 연기의 기초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도 무서웠다”는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촬영이 없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계 명작 소설, 추리 소설 등 여러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책을 하루 한 권씩 읽어야 그날의 할 일을 다 한 것 같았다고 한다.

‘읽지 않은 책은 책꽂이에 꽂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방대한 분량으로 완독한 사람이 드물다는 톨스토이의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같은 작품도 끝까지 읽어 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는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일까?’와 같은 철학적 사유에 빠져 몇 날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그렇게 문학은 “사고할 재료”가 되어 주었다. 그는 책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한 걸음씩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본 역시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읽고 또 읽는 완벽주의자다. 누구나 인정하는 대배우가 된 지금도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대사를 백 번도 넘게 읽는다고 한다. 김혜자는 “아흔아홉 번째 했을 때는 몰랐던 것을 백 번째 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까. 읽을수록 느껴지니까 대본을 계속 읽고 싶어진다”며 “잘 쓴 대본은 읽을수록 깊어진다. 우리가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을 때처럼, 건성으로 읽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일그러진 모성을 다룬 영화 <마더>는 셀 수 없는 작품에서 엄마 역할을 맡아 ‘국민 엄마’로 불리던 김혜자의 충격적인 재발견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당시 호흡을 맞췄던 봉준호 감독은 그가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며 “마치 자기 문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울고 있는 톨스토이를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매번 맡은 역마다 처음 사는 인생이니까” 언제나 신인의 마음으로 임한다는 것이 김혜자의 답이다.

그는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문장을 대사처럼 외우고 다닌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인생은 매 순간순간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연기를 하며 살 수 있어 생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다는 그에게, 책은 언제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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