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슬램덩크’는 남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2023년의 ‘슬램덩크’는 남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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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틸컷

1990년대 인기 농구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N차 관람’ 열기 속에 개봉 44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대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중 300만 관객을 넘긴 작품은 <너의 이름은>(367만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301만명)까지 총 세 편뿐이다. 

극장가에서 시작된 ‘슬램덩크 돌풍’은 서점가와 유통업계도 뒤흔들었다. 2월 둘째 주, 주요 온라인서점 종합 베스트셀러를 관련 도서가 ‘독식’했다. 예스24에서는 원작인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전20권) 시리즈가 3~22위를 석권했고, 알라딘에서는 영화 뒷이야기가 담긴 『슬램덩크 리소스』가 2위,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시리즈 전권이 5~24위를 차지했다. 영화 개봉 이후 농구화, 농구복, 농구가방 등 농구용품 판매도 전년 동기 대비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흥행은 당초 전망보다 다양한 관객층 사이에서 인기 몰이를 한 덕분이다. 개봉 초기에는 원작의 주요 독자층이었던 3040 남성이 확실한 티켓 파워를 보였지만, 꾸준히 입소문을 타면서 전 연령에서 관객을 모았고, 개봉 1주 차 남성이 과반수를 차지했던 성비는 현재 5대 5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서점가 상황도 비슷하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구매 독자층은 3040 남성이 46.6%로 주를 이뤘으나 영화 개봉 이후 한 달간 2030 여성이 43.9%까지 증가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젊은 여성들이 과거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스포츠물의 주요 소비자로 떠오른 이 현상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2023년에는 전 성별을 아우르는 데 성공한 <슬램덩크>와 같은 명작이 1990년대에는 왜 주로 남자들만의 추억으로 머물렀던 걸까. 20년 전 작품이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당시에는 문제시되지 않았던 여성차별적인 개그코드 등이 자취를 감추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남자 농구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다루는 작품이라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현 시대 여성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농구’를 비롯한 스포츠에 대한 인식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1985년 국민생활체육참여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답한 여성의 비율이 89.4%에 달했다고 한다. 만화 <슬램덩크>는 1990년 연재를 시작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여성이 성장 과정에서 운동을 남성만큼 친근하게 느끼기 어려웠다. 여성 스포츠기자가 한국 여성들의 운동 현실을 취재한 책 『여자가 운동을 한다는데』(클)에서는 “보통의 한국 여자들은 어린 시절에는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체육활동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즐기다가 2차 성징이 나타나면서부터 운동을 기피하기 시작한다. 내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이성 친구나 선생님,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부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대해 남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고 스스로 대상화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분석한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 운동을 즐기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를 깨달았다. 나에게는 구체적인 ‘롤 모델’이 없었던 것이다. 롤 모델이라는 게 단순히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여자 어른도 운동 하면 이렇게 신나고 즐겁다’ 혹은 ‘여자가 운동을 하는 게 이렇게 멋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이는 저자의 경험담이다.

최근 축구, 클라이밍 등 남성 위주의 종목으로 여겨지던 운동을 시작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성별 고정관념이 점차 옅어지면서 일어난 변화다. 여자 축구를 주제로 한 SBS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사격을 경험한 뒤 국가대표 선수가 된 코미디언 김민경 등 친근한 미디어 속 롤 모델도 많이 생겼다. 그렇게 2023년의 관객들은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슬램덩크’를 즐길 수 있었다. 20년 전과는 다르게 말이다. 물론 아직도 ‘운동’과 ‘여성’에 관한 수많은 고정관념과 차별이 존재하지만, 세상은 분명 변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뒤의 운동장은 어떤 모습일까?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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