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9시간’은 ‘건강한’ 노동이 될 수 있을까
‘주 69시간’은 ‘건강한’ 노동이 될 수 있을까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12.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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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에 관해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래노동시장 연구회(이하 연구회)가 지난 12일 발표한 노동 개혁 권고안이 논란이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현행 52시간에서 69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어서다.

연구회는 권고안에서 연장근로시간 산정 기준을 주 단위에서 최대 연 단위까지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노사 합의에 따라 바쁜 시기에는 연장근로를 몰아서 사용하고, 이후 충분한 휴식을 누리는 식으로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단 월 단위 이상으로 연장근로시간을 관리할 경우 근로일 간 최소 11시간의 연속휴식을 부여하고, 분기 단위 이상으로 관리할 경우 총 연장근로시간을 70~90% 수준으로 감축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뒀다.

양대 노총을 필두로 한 노동계의 반발은 거셌다. 노조 조직률이 14%에 불과한 한국에서 노동자보다는 사용자의 필요에 부응하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 허울뿐인 노동자의 선택권을 앞세워 과거 장시간 노동 체제로 회귀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각각 성명서를 내 “적정임금과 적정인력을 보장해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지 않도록 지속 가능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전면 재검토를 촉구한다” 등의 입장을 밝혔다.

무엇보다 해당 권고안이 제시하는 새로운 연장근로 기준은 노동자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러한 의견과 관련해 15일 “수요와 일감이 몰릴 때 일을 조금 더 하고, 여유가 있을 때 좀 더 쉰다는 기본적인 원칙은 타당성 있다”면서 “근로자 건강을 해칠 정도의 제도는 결코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근거가 있는 말일까.

권고안에 따라 연 단위로 연장근로시간을 산정한다면, 연간 440시간까지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이론적으로는 12주 연속으로 주 69시간 근무를 하더라도 연장근로시간이 총 348시간이므로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현재 고용노동부 고시에서 뇌심혈관계 질환 발병과 관련성이 강하다고 규정하고 있는 ‘만성 과로’(12주간 평균 주 60시간 이상 혹은 4주간 평균 주 64시간 이상 근무)에 해당한다.

주 52시간제가 시행되기 전인 2015년 출간된 책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코난북스)는 70년대 산업화 이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였던 장시간 노동 체제에 다방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책에 따르면, 1980년대에 이미 주 48시간 이상 근무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가 등장했다. 장시간 노동은 피로 누적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를 유발해 안전사고로 이어지기도 쉽다. 주당 64시간 이상 근무하는 경우 주당 40시간 근무하는 경우에 비해 안전사고 위험이 88%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주당 근무 시간이 60시간을 넘어가면 우울 증상을 호소할 가능성이 급격히 증가했고, 자살을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노동 시간은 노동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구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던 1929년 원산 총파업의 요구 사항 중에도 ‘8시간 노동제 실시’가 있었다. 지난 2018년, 장장 20년에 가까운 논의 끝에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었지만,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은 지난해 기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38개국 중 다섯 번째로 길다.

정부는 지난 21일 미래노동시장 연구회 권고안의 내용을 반영한 2023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해당 권고안의 제목은 ‘공정한 노동 시장,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였다. 과연 ‘주 69시간’ 근무가 건강한 노동이 될 수 있을까.

책은 말한다. “기계는 여덟 시간을 돌리건 24시간을 돌리건 전기를 공급하고 기름칠을 해 주고 부품을 교환해 주면 되지만, 인간의 몸과 정신은 그리고 삶은 그럴 수 없다”고.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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