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페이스북에 등을 돌렸나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페이스북에 등을 돌렸나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2.12.13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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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으로 떠오르던 시절이 있다. 불과 12년 전이다. 지난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돼 인근 아랍국가로 번진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은 SNS 덕분에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한 튀니지 청년이 정부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몸을 분신했고, 누군가 이를 촬영한 영상을 SNS에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영상은 곳곳으로 확산되면서 그동안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렀다. 정부는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하며 이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시민들은 그 상황을 글이나 사진, 영상 등으로 SNS에 올리며 권력의 추악한 행태를 폭로했다.

아프리카에서 멀리 떨어진 필리핀에서도 SNS를 통한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지난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는 당시 SNS가 불러왔던 정치 지형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 인물이다. 그는 최근 국내 번역출간된 회고록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에서 “전 세계가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CNN 동남아시아 지국장 출신인 그는 온라인 뉴스 매체 <래플러>를 창립하면서 시민 저널리즘 프로그램을 고안해냈다. 필리핀 내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자 이들이 직접 사회 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다. <래플러>가 뉴스를 만들어내면 이를 자사 페이스북 커뮤니티에 공급해 사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시민들이 사건을 목격하면 직접 휴대전화를 꺼내 알릴 수 있게 권한을 부여하기도 했다.

<래플러>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은 한동안 이어졌다. 선거 국면에서 정치인들을 초청해 시민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도 마련했으며, 시민들이 커뮤니티에서 사건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대책도 논의했다. 그렇게 <래플러>는 출범 1년 반 만에 필리핀에서 세 번째 주요 뉴스 사이트가 됐다. 마리아 레사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소셜미디어의 황금기였다”고. 시민 사회와 래플러의 성장에는 분명 페이스북이 일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정치권에서 부각되기 시작하자 상황은 곧 달라지기 시작했다. 두테르테도 페이스북을 적극 활용해 정치 활동을 했다. 문제는 그가 사법제도가 더디게 작동한다는 이유로 자경단의 살인을 묵인하고, 거칠고 저속한 말들을 뱉어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히틀러에 비견하기도 했으며, 인권법은 잊어버리라는 말도 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는데, 3년간 2만 7,0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자경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래플러를 포함한 언론이 페이스북에서 두테르테의 조치를 비판하기라도 하면 페이스북에서 집중 공격을 받았고, 현실에서도 안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권과 결탁한 인플루언서들은 래플러가 정권을 비판하면, 이를 음모론으로 치부하거나 조롱하며 사태를 악화시켰다. 어느새 필리핀의 SNS는 거짓정보, 음모론, 혐오와 차별 발언 등을 쏟아내는 친두테르테 파와 사실을 교정하고 나아가 두테르테를 비판하는 래플러의 전쟁터가 됐다.

이때 필요한 건 콘텐츠의 관리자인 페이스북의 중재였다. 그러나 마리아 레사는 “오늘날 페이스북은 공공의 안전보다 돈벌이를 선호한다”며 페이스북이 필리핀의 상황을 방치했다고 비판한다. “지금은 환멸을 넘어, 페이스북이 전 세계 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페이스북의 모든 결정이 이윤을 내고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이뤄진다는 이유에서다. 음모론이나 허위 정보, 혐오 발언 등 자극적인 콘텐츠들은 클릭을 부르고 구독자가 많은 페이스북 페이지는 돈을 벌 수 있으며, 이 수익은 페이스북 본사로도 이어진다. 마리아 레사가 마크 저커버그를 만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필리핀인 중 97퍼센트가 페이스북을 사용한다”는 말로 책임감을 일깨우려고 했지만, 돌아온 답은 “잠깐만요, 마리아. 나머지 3퍼센트는 어디로 갔죠?”.

마리아 레사는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함께 정보 위기 해결을 위한 열 가지 전략을 책의 부록으로 적어놓았다. 그 중 첫 번째는 모든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요구로, “기술 기업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인권 영향 평가를 수행하게 하고 그것을 공개하게 하라. 콘텐츠 조정부터 알고리즘의 효과, 데이터 처리, 진실성 정책까지 사업의 모든 측면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라”는 것이다.

마리아 레사의 비판은 페이스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최근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면서 신규 가입자가 하루 2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뉴스에 이어, 트위터 내 인종차별‧혐오 표현이 급증했다는 소식도 동시에 들리고 있다. 마리아 레사의 말처럼, 지금 이 시대 우리의 공론장은 정말 괜찮은가.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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