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독서법 전성시대, 세상에서 가장 느린 ‘OO 독서법’
빠른 독서법 전성시대, 세상에서 가장 느린 ‘OO 독서법’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12.10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인 독서율은 계속 떨어진다는데, 각종 ‘독서법’ 책은 쏟아진다. 돈이 되는 독서, 공부에 도움이 되는 독서, 빠르고 효율적인 독서… 물론 때로는 목적 지향적인 독서도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는 책만이 줄 수 있는 경험, 독서의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독서법을 다룬 책이 또 한 권 출간됐다. 그런데 이 책이 제안하는 독서법은 점점 빨라지기만 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느리디 느린 독서법이다. 이를 소개하는 태도도 여느 독서법 책과는 사뭇 다르다. 독서법의 목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저마다 ‘간증’ 같은 경험을 들려주며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초대를 조심스레 건넨다. ‘북텔러리스트’의 『공감 낭독자』(샨티).

‘북텔러리스트’는 성우와 아나운서, 연출가로 구성된 낭독 집단이다. 그 시작은 우연한 만남이었다. 연출가 이진숙과 성우 구자형은 당시만 해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오디오북 낭독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시험 삼아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유능한 성우들과 함께 작업실에 모였다. 원래는 가볍게 낭독을 마치고 다함께 맛집을 가려던 계획이었지만, 맛집에는 갈 수 없었다. 낭독이란 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방송대상 성우 내레이션상을 수상한 구자형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베테랑 성우들이 자신만만하게 책을 읽어 나갔지만, “소리는 들리는데, 내용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는 충격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2분이면 끝날 분량을 읽고 또 읽다 보니 무려 여섯 시간이 지나 있었고, 이 날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낭독을 훈련하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모임을 이어간 지 어언 9년. 이들은 이제 낭독 팟캐스트와 공연 등을 진행하며, 책 읽기로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 줄 안다. 실감 나는 낭독을 해 보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모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소통과 공감, 치유를 경험하게 하는 낭독의 매력에 푹 빠져서다.

목소리로 일하는 성우들에게 책을 읽는 일이 왜 그리 어렵고, 또 매력적이었을까. 낭독은 단순히 편안한 목소리로 글자를 읽어 주는 일이 아니었다. 풍부한 시각 정보가 함께하는 영상 더빙과 달리, 오로지 음성만으로 듣는 이에게 내용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려면 낭독자 자신이 먼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가상의 시공간과 인물들을 눈앞에 그릴 수 있어야 소리의 방향과 어조 등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책 한 권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으며, 눈으로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갈 장면도 온몸으로 감각을 상상하며 읽는 훈련을 했다.

그러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김두리 성우는 ‘국민 가수’ 김광석을 알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별다른 추억이나 감흥이 없었다. “김광석이라면 언제라도 1989년 여름, 춘천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던 시외버스가 기억난다”고 회고하는 작가 김연수의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낭독을 위해 한 편의 글을 샅샅이 읽고 나자, ‘김광석’ 하면 “그 시절의 학생 운동, 젊은이들이 서로의 고통을 달래며 나누던 술 한 잔, 함께 부르던 노래, 그 밤과 새벽의 쌀쌀한 공기, 사라진 이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품고 위로하던 김광석의 노랫말과 따뜻한 목소리”라는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감각 때문에 눈물을 쏟을 정도로 깊이 공감하게 됐다.

한국어판 『해리 포터』 시리즈 오디오북의 단독 낭독자로 1인 200역을 소화해 낸 조경아 성우는 장장 1년에 걸친 녹음 기간 동안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에 휩싸이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다 보니, 묻어 두고 살던 오랜 기억과 상처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오히려 치유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막연했던 나의 감정들은 작가가 써 놓은 정교한 문장들 안에 구체화되어 있었고,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등장인물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조차 듣지 못하던, 혹은 말하고 싶지만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부옇게 흐르고 있던 내 안의 목소리였고, 그 소리로 나는 나 자신과 다시 만나고 있었다. (…) 그렇게 나는 실체를 모르던 내 내면의 목소리를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할 수 있었고,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

빠른 독서법 전성시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독서법을 전파하는 ‘북텔러리스트’들은 말한다. “이런 경험들을 얻기 위해 낭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낭독을 해서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당신도 꼭, 책과 목소리만 있으면 되는 낭독의 즐거움을 느껴 보길 바란다고.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