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는 숲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는 숲
  • 스미레
  • 승인 2022.09.13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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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아이 두 돌쯤이 아니었을까. 몇 날째 나는 표정 없는 아파트 숲속에 정교하게 지어진 좁은 섬, 놀이터 안에서 주변 건물들이 투루루루, 헐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 는 생각을 꾹꾹 눌러 접고 있었다. 오래 살아온 곳. 코 닿을 곳에 맛집이며 멋집, 온갖 편의 시설이 모여 있는 곳. 심지어 ‘사교육 1번지’라며 아이 키우기마저 좋다는 그 동네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속에서는 알 수 없는 동심원 하나가 자꾸만 퍼져나가고 있었다.

구경이나 해 볼 요량으로 이 집을 찾았다. 서울과 가깝지만, 사위가 산으로 둘러져 외딴 느낌이 들었다. 아담한 거실과 마당은 세 식구 단출한 살림을 꾸리기 적당해 보였다. 끄덕끄덕 하나씩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부엌이었다. “이 집에서 제일은요.” 그때까지 빙긋 웃고만 계시던 안주인 아주머니가 살며시 다가선다. “숲이에요. 보세요, 이 앞이 다 숲이랍니다.” 마침내 그가 자랑스레 창문을 열자 맑은 바람과 새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달음질해온다. 눈앞에 일렁이는 건 놀랍게도 전부 숲. 눈부신 오월의 숲이었다.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했다. 아이 네 돌이 조금 지나서였다.

볕이 느슨해질 무렵 숲에 드는 일은 곧 우리의 일과가 되었다. 주로 숲 입구에 총총 마실 가듯 다녔지만, 그래도 좋았다. “엄마! 여기 자벌레! 꼭 무지개 링 같다. 몸을 움츠렸다 펴면서 앞으로 나가네. 조그만데 씩씩해.” 숲에서 아이는 아다지오로 걸으며 몰랐던 존재들과 인사하고 낯선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했다. 작고 낮은 것에 더 자주 시선을 맞추며 다디단 공기 맛과 목적 없이 걷는 즐거움도 생각보다 금세 알았다.

그 곁에서 나는, 데이빗 호크니 생각을 자주 했다. 맞다. 그는 유명한 화가다. 우중충한 영국 요크셔의 숲에서 나고 자란 호크니는 20대에 미국 서부의 빛나는 날씨와 호화로운 생활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하며 ‘화가의 초상’ , ‘더 큰 첨벙’ 등 세기의 걸작들을 쏟아낸다. 그가 세상의 온갖 화려함과 새로움을 작정한 듯 발견해나가던 시기였다. 세월이 흘러 초로에 접어든 호크니는 그 모든 번쩍임을 뒤로 한 채 우중충한 고향 숲으로 회귀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이 잘 아는 곳을 그려낼 참이었다. 소년 시절 그대로, 어둡고 정다운 요크셔 숲을.

숲을 걸으며 내겐 그런 공간이 없다는 걸 점차 깨우쳤다. 내가 아는 곳은 빠르게 바뀌고 사라져갈 뿐이었다. 작별 인사도 못다 한 골목들, 상점들, 아파트들. 다시는 찾아갈 수 없는 곳과 볼 수 없는 장면이 함부로 늘어가는 것. 그 앞에서 나는 하필 그런 데다 정을 들인 자신을 꾸중할 뿐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런데 숲은 좀 달라 보였다. 지긋한 연식으로 보나 의젓한 품새로 보나 누구에게도 그런 무례는 범치 않을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낯선 얼굴을 보인 적 없는 곳. 숲에 들어설 때면 오랜 후에라도 이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아줄 거란 안심이 들었다. “있잖아. 나중에 네가 할아버지가 되어도 숲을 보거나 숲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좋을 거야. 아무리 슬픈 날에도 말이야. 누가 그랬는데, 고향이 그런 곳이래. 언제 떠올려도 마음이 좋은 곳. 어쩌면 여기가 우리 고향인지도 몰라.” 아이에게 말했다. 찬찬히 눈 맞추고 오래도록 발 딛으며 동무 맺은 숲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종일 에너지를 뿜으며 놀던 아이도 숲에서는 조용히 걷는다. 그땐 나도 입을 다문다. 사색가 아닌 산책자는 있어도 산책자 아닌 사색가는 없다던가. 숲에서 우리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그저 걸을 뿐이다. 그렇게 긴 숨을 쉬며 본 것들, 걷다 나온 생각들이 아이의 교양과 지식이 되고 그림과 노래가 되는 것을 몇 해 동안 즐겁게 지켜보았다.

숲은 지금 가을이다. 만질만질 보석 같은 햇도토리를 줍는 아이 얼굴이 능금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계절. 경쟁자도 없는데 그토록 열심인 아이를 볼 때면 ‘채집’이란 말과 ‘본능’이란 말이 나란히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가만히 나를 부른다. “엄마, 저기 다람쥐...” 아이는 다람쥐와 눈이 마주친 채 미동도 없다. 먼저 움직인 건 아이 쪽이었다. 머쓱한 얼굴로 주머니 가득 찔러 넣었던 도토리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다람쥐야, 이거 다 너 줄게. 맛있게 먹어.” 이번엔 ‘선함’과 ‘공존’ 이란 말이 떠올라 살폿 웃었네.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음을 아는 마음. 애써 모은 좋은 것을 나누고자 하는 소망. 이 역시 우리 안에 새겨진 본능임을 나는 숲의 아이를 통해 보곤 한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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