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다? 게으를 ‘시간’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다? 게으를 ‘시간’이 없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7.19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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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에서는 빈곤을 전 세계가 풀어야 하는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 과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빈곤 문제는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은 빠르게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며 절대적 빈곤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상대적 빈곤 지수가 높은 나라다. 오늘날 한국에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실패한 소위 ‘벼락 거지’들과 별다른 사건 없이도 일정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빈민들이 공존한다.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태어날 때 가난한 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한 건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빈곤에는 반드시 개인적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정말 빈곤은 무능이나 게으름에 대한 징벌일까? 최근 출간된 빈곤 연구자 루스 리스터의 책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갈라파고스)에 따르면 빈곤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무능하거나 게으르지 않았다.

책에 따르면 “빈곤을 감당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부유한 사람은 노동을 절감해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여 시간을 절약하는 반면, 빈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대신 시간을 써야 한다. 또한 연구 결과 대부분의 빈곤층은 부자와 비슷하거나 더 치밀하게 재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부족한 소득으로 견뎌 내려면 “노련한 예산 수립, 구매, 식단 구성 기술” 등이 필요한데, 이는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전투” 같은 고된 작업이다. 하루하루를 견뎌 내는 일의 어려움은 장기적인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빈곤은 구조적 문제로부터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양극화는 물론이고 성별, 인종, 장애 등의 요인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빈곤을 심화시킨다.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와 같이 명확한 수치로 나타나는 불평등도 있지만, 현재의 측정 기준으로는 정확하게 진단하기 힘든 문제들도 있다. 가령 현재는 빈곤을 측정할 때 주로 가구 소득 전체를 기준으로 하지만, 한 가족 내에서도 빈곤을 경험하는 정도나 양상이 다를 수 있다. 가족 구성원 간에도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지난해 우리나라 빈곤의 특징 중 하나로 ‘여성화’를 꼽았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이 심각한데, 그 중에서도 노년기 여성 가구주의 빈곤율(65.1%)은 같은 세대 남성 빈곤율(30.7%)의 두 배 이상이었다. 경력단절, 저임금 노동 등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온 불평등이 여성 노인을 더 큰 빈곤으로 내몬 것이다.

가부장제 속에서 여성은 똑같이 임금노동을 하더라도 더 많은 가사노동에 시달리며, 이는 시간 자원을 더욱 부족하게 해 빈곤을 심화시킨다. 또 여성이 가정 내에서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현재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빈곤에 취약한 상태일 수 있다. 책에서는 “특정 시점에 어떠한 물질적 생활수준을 누리든 간에, 자원에 대한 통제권과 자기를 부양할 독립적 수단이 부족하다면” 빈곤에 취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책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포도밭출판사)에서는 여성이자 이주민으로서 두 겹의 불평등 속에서 빈곤에 취약한 상태로 살아가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이들은 임금노동에서 가사노동에 이르기까지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일하며 보내지만, 이들이 벌어 온 돈은 주로 남편이나 시어머니의 통장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한인정 작가는 그들이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것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사람’, 이 말에서 우리는 편견을 걷어내고 빈곤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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