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기 전성시대’
지금은 ‘일기 전성시대’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7.1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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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가 창작의 근간이 된다는 말은 흔하지만 사실 일기가 시나 소설이 되지 않아도 좋다. 무언가가 되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일기일 뿐인 일기,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은 일기를 사랑한다.”

-문보영, 『일기시대』 中

지난 몇 년간 불었던 에세이 열풍은 서점의 판매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업세이(직업+에세이), 서간문 등 기존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형식의 에세이들이 세부 장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가운데, ‘일기’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사적 기록, 또는 (작가들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의 사전 단계쯤으로만 여겨졌던 일기는 이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출판 콘텐츠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민음사에서는 작가들의 일기 시리즈인 ‘매일과 영원’ 시리즈를 론칭했다. 시집 『책기둥』(민음사)으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던 문보영 시인이 『일기시대』라는 제목으로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다. 문보영 시인이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일기 딜리버리’는 온라인으로 시인의 일기를 전송하고, 손으로 쓴 일기를 우편으로 부쳐 주는 유료 일기 구독 서비스다. ‘누가 남의 일기를 돈 주고 읽나’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이 서비스가 몇 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은 일기”에 대한 일정한 수요를 방증한다.

『아무튼, 아이돌』의 윤혜은 작가는 지난 2020년 십 년간 쓴 손때 묻은 일기장을 책 『일기 쓰고 있네, 혜은』(어떤책)으로 엮어 내며 데뷔했다. 스스로 ‘일기인간’이라 칭하는 윤혜은 작가는 현재 천선란 작가, 윤소진 편집자와 함께 일기를 주제로 하는 팟캐스트 <일기 떨기>를 진행하고 있다. 윤소진 편집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버지니아 울프나 카프카의 일기는 내용에서 시차가 발생하는데, 우리 일기는 현재의 사람들과 현재의 고민을 나누는 거라 외롭지 않게 내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최근 출간된 『빅토리 노트』(콜라주)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에세이스트 중 한 명인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 이옥선 씨가 1976년부터 1981년까지 5년간 썼던 육아일기다. 김하나 작가가 저서 『힘 빼기의 기술』(시공사)에서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해당 육아일기를 언급한 이후, 이 책은 만들어지기 전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책에는 일기 텍스트뿐만 아니라 김하나 작가의 어린 시절 사진, 출생증, 누렇게 바랜 일기장의 모습, 이옥선 씨의 육필 등의 이미지가 대량 수록돼 실제 육아일기를 읽는 듯 생생한 느낌을 준다.

또래 아이들은 모두 걸어 다니던 시기, 어머니로부터 “아직도 기어 다니다니 부끄럽지도 않니?”라는 애정 섞인 핀잔을 듣던 김하나 작가는 자라서 『힘 빼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쓰고, 남들 뛸 때 따라 뛸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살게 됐다. 매년 생일마다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어머니의 육아일기를 꺼내 읽었다는 김하나 작가는 “‘빅토리 노트’를 펴 볼 때마다 나의 태어남을 기뻐하고, 작고 연약한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보듬어 준 누군가가 세상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사로운 소재를 다루는 장르인 에세이 안에서도 가장 사사로운 글인 일기가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비결은 ‘푼크툼’에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개념인 ‘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찌름’, ‘작은 구멍’을 뜻하는 단어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며 개인적인 기억을 자극하는 예술 작품의 사소한 부분을 가리킨다. 일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소하고도 내밀한 감정과 구체적인 세부 묘사는 어떤 글보다도 뾰족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찌를’ 수 있다.

일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희미해진 지금의 창작 생태계와도 절묘하게 맞물린다. 100만 가입자를 보유한 일기 SNS 앱 ‘세줄일기’ 관계자는 최근 출판을 비롯한 콘텐츠 관련 업계에서 일기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늘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사적인 영역의 일기 콘텐츠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라고 분석했다. 세줄일기는 일기 콘텐츠의 가치에 주목해 일기가치연구소 설립 등을 계획 중이며, 얼마 전에는 이용자들의 일기를 NFT로 발행하는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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