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모퉁이 서점에서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모퉁이 서점에서
  • 스미레
  • 승인 2022.06.13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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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점 주인’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내 취향의 책들로 촘촘한 공간. 난롯가 흔들의자에서 뜨개질하다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면 푸근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할머니가 되는 상상은 할수록 달콤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서점을 눈여겨본다. 국내든 해외든 유명 관광지는 접어둔 채 동네 서점부터 찾는다. 자연스레 도시마다 특기할만한 서점이 하나둘 생겨났다.

미국 포틀랜드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중고 서점이 있다. 중고 책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나로서는 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둥실한 마음을 안고 찾아간 그곳은, 컸다. 그러니까 무지 컸다. 그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책을 찾다 잃고, 직원을 부르려다 잃고, 끝내는 내가 무엇을 찾는지조차 잃어버렸다. 마침내 녹초가 되어 당도한 계산대에선 화려한 굿즈를 집어 드느라 책 사는 즐거움을 잃었다. 허탈함과 고단함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거리로 나왔을 땐 해가 다 저물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아이와 들렀던 제주도의 서점도 떠오른다. 이곳은 작은 서점이다. 한창 성업 중인 여느 독립 서점처럼 예쁜 인테리어와 아기자기한 팬시들이 가득하기로 유명했다. 동시에 버스조차 잘 닿지 않는 외딴 서점이기도 했다. 그런 서점에 곧잘 따라붙는 환상을 떨쳐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큰맘 먹고 물어물어 찾은 그곳은 무늬만 동네 서점이었을 뿐 딱히 정겹지는 않았다. 직원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아이가 고개만 돌려도“손대지 마라!”윽박이다. 팔짱을 끼고서 아이를 달고 온 나를 원망하듯 쳐다보던 그 눈빛에 죄인이 된 심정마저 들었다. 아이와 나는 물론 동행한 친정엄마까지 얼어붙은 채 울상이었다. 허둥대다 아무 책이나 들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작열하던 제주의 여름 한낮.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서점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달포에 한두 번, 백화점 대형 서점을 찾는다. 나로서는 극도로 꺼리는 백화점 출입이건만 그래 어쨌든 책. 책을 사야 하니까.

황량한 주차장, 차가운 에스컬레이터, 서점 입구를 점령한 잡다한 문구류. 아이에게 서점이 딱 그만큼으로 남을까 겁이 났다. 내가 아는 동네 서점은 그렇지 않았는데. 주로 문제집과 잡지류를 팔던 작은 서점이었지만 멀리서도 그 투박한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푹해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공기를 오랜만에 느낀 건 뮌헨에서였다. 낮고 좁은 옛날식 목조 건물의 2층. 그저 지나치다 마주친 우연한 조우였다. 그런데 왜인지 꼭 처음이 아닌 듯 안온했다. 그 서점엔 멋진 가구나 눈에 띄는 컨셉도, 향 좋은 브랜드 커피도, 책이 아닌 물건이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없었다. 점원의 빼꼼한 인사 뒤론 시간이 다 멈춘 듯 정적이었다. 아아. 그리웠던 먼지 냄새, 오래된 책의 고소하고 큼큼한 냄새. 삐걱대는 나무 층계를 하나씩 밟을 때마다 내가 알던 서점, 그러니까 90년대 서울의 서점이 등불처럼 깜빡였다.

잠시 멈춰 이런 서점 같은 사람이, 그리고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 빠르게 변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우리의 분위기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저 지금처럼 모두가 제자리에서 담담히 할 일을 하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웃고, 가끔 토라져도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기쁘게 나누며 그렇게 따뜻한 채로.

오랜만의 두근거림을 알아챈 듯, 창으로 깊숙이 들어온 오후 햇빛이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을 뽀얗게 비추었다. 내다본 거리엔 여름이 한창이었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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