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의정 참고 도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의정 참고 도서?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2.05.30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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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거로 뽑는 사람 중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도지사 외에도 ‘기초 의원’이라는 정치인들이 있다. 시의원이나 구의원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동네 주민의 대표자로서 그 지방자치단체만의 법인 ‘조례’를 제정하거나 개정‧폐지하는 활동을 한다. 지자체의 국회의원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각 지역의 의회 사무국은 이들이 효율적인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종 물품이나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여기에는 ‘책’도 포함돼 있다. 의원들이 조례 제정이나 역량 강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참고 자료다. 의원들이 구의회 사무국에 도서 구입 신청을 하면, 구의회 사무국은 이를 접수해 도서를 구입한다. 가끔 대통령들이 특정 책을 언급하며 국정 운영 방향을 예고하는 만큼, 기초 의원들의 의정활동에도 책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6.1 전국동시지방선거로 각 지방의원들이 4년간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요즘, 그들은 임기 동안 어떤 책을 읽었을까. <독서신문>은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구의원들이 임기를 시작한 2018년 7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의정 참고 도서 구입비 지출’ 내역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이들이 구입한 도서 목록을 살펴봤다. 그런데 개중에는 의정 활동과 관련 없어 보이는 도서가 다수 있었다.

일단, 이 기간 동안 각 의회 사무국에서 구입한 도서는 총 1만 1천여 권. 책의 가격을 모두 더하면 2억 2천 800만원 정도였다. 가장 많이 구매한 의회는 노원구(1,348권)이며 가장 적게 구매한 의회는 영등포구(77권)였다. 동대문구는 관련 예산이 없어 자료가 존재하지 않다고 밝혔다.

각 의회 사무국이 보내온 자료에는 『지방의회운영』, 『한국의 여성정치를 보다』 등 의정연수전문기관 제윤의정과 한국여성의정에서 편찬한 책들이 더러 있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소설이나 자기계발서 등의 베스트셀러가 더 많았다. 특히 899권을 구입한 용산구의회의 경우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지방자치론』, 『시민참여론』, 『실전지방의회운영』 외 10여 권을 제외한 책들은 지방 의정에 참고한다고 하기에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책들이었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많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히 비판할 수는 없다. 의원들이 조례를 제정하는 활동에서 더 나아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참고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도서목록도 존재했다. 『손글씨레시피』, 『요가저널코리아』(이상 강동구), 『거제가정식』(강서구), 『유럽 축구 명장의 전술』, 『5년 후 나에게 Q&A』, 『필라테스 올인원』, 『커피로스팅』(이상 노원구), 『내가 봐도 괜찮은 캘리그라피 쓰는 법…』(마포구), 『요리 마법사 아하부장의 매직 레시피』(용산구), 『진짜 하루만에 끝내는 이모티콘』, 『한 권으로 끝내는 쇼핑몰 창업&운영』(이상 은평구), 『백종원이 추천하는 집밥 메뉴 애장판』(중랑구) 등의 도서는 의정활동 참고도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독자들은 이 책들을 인터넷에 검색 후 의원들의 의정활동과 비교 대조해보길 바란다. 

다음의 도서들은 어떨까. 대표적인 19금 도서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판타지 소설 『로스트헤븐』(이상 중랑구), 『달빛 조각사』(구로구) 말이다. 신간도 유행하는 책도 아닌 이 책들은 의원 개인이 사적인 취향으로 구매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한편, 의원들은 해외 연수 프로그램으로 외국 지역을 답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는 『김영철,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나 『저스트고 유럽5개국』 등의 도서를 구매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하지만 『해커스 토익 1000제』(강남구)나 『해커스 뉴텝스』(금천구)를 같은 목적에서 구매했다고 말하면 궁색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의원들이 여러 책을 참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정 활동을 펼치는 것은 격려할 일이다. 그러나 의정 참고 도서가 국민의 세금으로 구비되는 만큼, 의정 활동과 관련없는 책 구매는 주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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