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유통기한은…
책의 유통기한은…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4.15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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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이라는 단어는 주로 옷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된다. 옷 수선을 맡기는 건 내 체형과 요구사항에 맞게 다듬어 더 오래 입기 위해서다. 치수가 맞지 않는 옷, 얼룩이 진 옷, 지퍼가 고장 난 옷 등은 수선을 마치고 나면 새 옷처럼 편하고 말끔한 옷이 된다. 그런데 책의 세계에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름도 낯선 책 수선가다. 책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을 쓴 ‘재영책수선’은 2014년에 처음 책 수선을 시작한 이래 약 2천권의 책을 수선했다.

책을 수선하려면 사포와 붓, 실과 바늘, 망치 등 각종 도구를 세심하게 사용해야 한다. 찢어진 페이지를 붙이고, 낙서를 지우고, 오염을 제거하고, 형태가 뒤틀어진 책은 긴 시간을 들여 바로잡는다. 뿐만 아니다. 오래된 책의 디자인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직접 동판을 제작해 인쇄하기도 하고, 튼튼하고 예쁜 표지를 새로 디자인해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의뢰인의 취향과 의견을 반영해 이루어진다.

옷에 비하면 저렴한 데다 몸에 맞출 필요도 없는 책을 새로 사지 않고 수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선이 의뢰되는 책에는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어머니의 유품부터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성경, 외국 헌책방에서 기념 삼아 사 온 책, 한국전쟁을 버틴 할머니의 일기장, 어린 시절 즐겨 읽은 해리포터 전집, 33년 된 결혼 앨범까지. 수선이 필요 없어 보일 만큼 미세하게 찢어진 책도 있지만 거미 똥으로 뒤덮인 책, 하도 읽어 닳아빠진 책, 표지가 사라져 낱장으로 분해된 책도 있다. 우리의 책장에 꽂힌 깨끗한 책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책 수선가’가 아니라 ‘책 수리기사’였다면 심하게 파손된 책을 가져온 의뢰인들을 따끔하게 혼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면서 올바른 관리 방법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 수선가에게 손때가 묻고 더러워진 책, 찢어지고 구겨진 페이지는 책 주인의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다. 그는 계속 사랑받을 책의 운명을 고려해 더욱 견고한 옷을 입힌다.

책 수선가로 사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듯, 오래된 책일수록 내구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수선 과정에서 실수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뜯어진 표지의 올을 하나하나 풀어 다시 잇고, 0.5밀리미터도 어긋나지 않도록 정확히 치수를 재는 작업을 할 때면 아무리 책 수선의 장인이라도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을 만큼 예민해진다. 의뢰인의 추억이 담긴 책은 어디에서도 다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 주인의 독서 습관이 느껴지는, 개성 있는 책들의 모습은 한 사진가의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국내에서는 『테디베어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사진가 마크 닉슨의 프로젝트 ‘Much loved(넘치게 사랑받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인형들의 초상은 처음 봤을 때는 기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에게 ‘넘치게 사랑받은’ 탓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망가진 책에서 사랑과 추억을 발견하고, 이를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돕는 책 수선가의 기록은 대체 불가능한 아날로그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준다.

종이책은 한 권 한 권이 희귀본이다. 전자책이 발달해 태블릿 PC 하나로 책 수천 권을 휴대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지만, 종이책을 넘길 때의 촉감과 냄새, 페이지를 접으며 했던 생각, 책을 선물하고 받으며 느꼈던 감정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종이책의 가치는 무너지지 않는다.

책의 수명은 몇 년일까. 작가는 “영원하다”고 말한다. 책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수선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얻는 ‘진화’를 계속한다면 말이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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