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의 SF 이야기 "격한 감정의 시대, 온화한 사람들이 귀해요"
정세랑의 SF 이야기 "격한 감정의 시대, 온화한 사람들이 귀해요"
  • 심완선 SF 전문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2.21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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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SF를 좋아해 :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독서신문에서 『우리는 SF를 좋아해』(민음사) 출간 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김초엽, 정세랑, 김보영, 듀나, 배명훈, 정소연 등 국내 유명 SF 작가 6인이 인터뷰이로 참여했습니다. 책 내용 중 하이라이트 부분을 공개합니다. 독자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정세랑 작가

SF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리는 장르라고 합니다. SF 전문 칼럼니스트 심완선이 오늘의 한국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여섯 명의 SF 작가를 직접 만나, 새로운 이야기의 힘을 묻고 듣습니다. 글쓰기, 새로운 세계의 창조, 마감과 함께하는 작가의 일상, 그리고 무수한 가능성들의 우주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는 올해 봄 단행본으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Q. 하루의 작업시간은 어느 정도인가요? 글 쓰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하시나요.

“여덟 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측정하진 않고 아침 먹고 점심까지, 점심 먹고 저녁까지 해요.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필요한 양을 소화해낼 수가 없더라고요. 요새는 자체 주 4일제를 하고 싶습니다. 매주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질을 추구하고 싶어요. 저녁이 되면 한이 맺힌 것처럼 놀게 됩니다. 놀고 싶어서 자기가 싫어요. 무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제안보다는 저의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일하려고 하고요. 번아웃 쪽으로 미끄러지는 걸 경계하고 있어요.

그리고 글을 위해 말하는 시간을 줄여요. 강연, 언론 노출 등 말하기를 즐겨 하시면서도 좋은 작업물을 꾸준히 선보이는 분들이 계시지만 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운 타입인 것 같아요. 말하기 자체가 싫다기보단 에너지 소모가 커서 쓰기를 방해받게 되더라고요.”

Q.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걸러내려면 자기확신도 꽤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라는 직업은 어느 정도 책이 나오기 전에는 확신이나 인정을 얻기가 쉽지 않고요.

“1년에 단 한 편의 좋은 단편을 써도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길이가 짧든 길든 완성의 경험을 한 사람은 다 작가라고 여기고 있어요. 주변의 인정과 경제적 자립에 작가의 정체성을 연결시켜버리면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커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책이 나와도 대단한 보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가벼이 평가해버리니, 다른 사람의 인정 같은 것은 애초에 신경 쓰는 범위 바깥으로 밀어내버리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제 경우도 겨우 몇 년 전에야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라는 걸 인정받은 것 같아요. 오래 걸렸고 주변의 인정을 받기 전에는 마음 상할 일이 많았어요. 마음이 덜 상하려면 방점을 두어야 할 곳은 완성의 경험 그 자체인 듯해요. 어떤 이야기가 나를 완전히 통과했고 끝났다는 느낌요.”

Q. 세랑님은 어떤 시점에 글이 ‘끝났다’고 느끼나요? 언제 처음 느꼈나요?

“요철 없이 읽힐 때, 혹은 적당한 요철만이 남아 있을 때요. 처음에 단편을 투고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끝냈다는 감각을 느꼈어요. 이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어, 하고 봉투에 넣으면서요. 그런데 그 완성의 감각 자체도 시간이 지나면 또 희미해지는 것은 같습니다. 책이 나올 때는 완성되었다 싶은데, 몇 년 지나면 생각이 달라져서 고치고 싶어지니까요. 그럴 때 개정판을 만들 기회가 오면 기쁩니다. 물론 결벽적으로 작품을 업데이트할 필요는 없고, 작품은 시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겠지만, 기회가 있을 때 수정하는 것도 뜻깊은 경험인 듯합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멈춰 있지 않고 몇 년만 지나도 쌓인 경험이 영향을 미치니까요. 몇몇 이야기는 후속작도 내고 싶어요. 그런데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미루게 되네요.

수정을 자주 하지만, 작품의 주제 자체는 시간이 지나도 늘 유효한 것 같아요. 답을 찾기 어려워 오래 곱씹는 질문에 관해 쓰기 때문에, 표현은 바꾸고 싶어도 뼈대를 바꾸고 싶을 때는 잘 없습니다. 다른 작가분들 책을 읽을 때도 집요하게 오랜 주제를 파고드는 모습을 좋아합니다. 한 주제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쓰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고집 세고 끈질긴 사람들이 글을 쓰게 되는구나, 감탄해요.”

Q. 세랑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나요? 어떤 모습인가요?

“언제나 단어를 천천히 고르는 온화한 사람들을 상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화함을 미지근하다고 저평가하지만, 격한 감정으로 쉽게 치우치는 시대에 온화한 사람들이 귀하지 않나 생각해요.

말하기보다 읽기와 쓰기가 편한 분들일 거라고도 상상해요. 저도 순발력이 좋지 않아서 말을 두서없이 하는 편인데, 읽기와 쓰기에서 안정을 찾아요. 비슷한 성향의 분들이 많이 읽고 많이 쓰시면 좋겠어요.”

Q. 자신의 이야기를 공기층으로 비유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안전한 느낌은 비현실일 때 쉽게 가능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와 관련해 SF는 비현실인 만큼 진보적일 수 있지만 그만큼 현실도피가 될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오락 소설’을 쓰고자 하는 분으로서 생각하게 되는 점이 있으실 것 같아요.

“현실보다는 현실 약간 옆이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주제를 이야기할 때 처참한 것을 처참한 대로 그리는 것도 유의미하고 거리를 벌려 자극과 충격을 다소간 조절하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믿습니다. 어느 한쪽만 유효하다고 보지는 않기에, 그다음은 쓰고 읽는 사람의 선택이겠죠. SF 독자로서는 도피적인 부분보다 전복적인 부분을 더 많이 느껴온 것 같습니다. 쓸 때도 목표는 대체로 전복이었습니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항상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싶어요. 유익한 소설도 있고 즐거움만을 목표로 하는 소설도 있고 다양하게 쓰이는 쪽이 건강하지 않나 싶어서요.”

Q. 열심히 일하는, 피곤한 인물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세랑님의 소설에 대해 ‘치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이 무겁지 않은 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글에서 어떻게 무게를 덜어내시나요?

“의식적이기보다는 제가 독자로서 가장 지쳤을 때 책을 드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에게 읽는 것이 언제나 회복의 시간이어서 쓸 때도 그런 방향으로 기우나 봐요.

가까운 친구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도, 글의 무게감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고요. 매일 메신저로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서 가장 힘을 많이 얻거든요. 친구들의 10대, 20대, 30대를 다 알아올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래 지속되어 온 대화 속에 있다는 것, 친밀감과 신뢰 속에 있다는 것이 글과 삶의 무게 추가 됩니다. 점점 더,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어 주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말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해요. 의미 없는 수많은 관계 속에 놓이기보다, 직접 선택한 소수의 관계를 계속 가꾸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친구들을 떠올릴 때 안전함을 느끼고, 어떤 테두리 안에, 팔 안에 안겨 보호받고 있는 이미지가 먼저 오거든요. 그 소중한 감각을 소설 속에 담고 싶을 때가 많고요.”

Q. 스스로 기이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셨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이나 과정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재인, 재욱, 재훈』의 초능력은 그냥 생기죠. 편지의 정체도 알 수 없고요. 『덧니가 보고 싶어』에서도 용기의 몸에는 그냥 문장이 생기고요. 『보건교사 안은영』의 은영의 능력도 이유가 없습니다.

“생략을 좋아합니다. 이 텍스트 위의 세계에서는 그렇다고 하자, 하고 약속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들이 늘 신나요. 보드게임의 규칙 같은 게 아닐까 합니다. 『재인, 재욱, 재훈』의 초능력 관련된 부분도 일부러 생략한 부분이죠. 누가 초능력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모르는 쪽이 주제에 적합해 보였어요. 인물이 자기 역할을 스스로 파악하고 의지대로 움직이려면요. 독자분들이 그 생략에 동의해 주셔서 좋더라고요.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누가 친절히 설명해 주는 일은 잘 없지 않나요? 그냥 세계에 던져져서 모호함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죠. 세계를 잘 모르고 확신도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행동할 거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을 좋아해서요.”

Q. 세랑님 소설에 나오는 건강한 여자들, 아름다운 여자들, 분노하고 이를 가는 여자들, 못되고 귀여운 여자들이 좋아요. 이들의 매력과 약점을 어떻게 불어넣으시나요?

“사람들이 일관적이지 않을 때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늘 절제해 온 인물이 갑자기 감정을 분출한다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강경했던 인물이 다른 문제엔 물렁하다거나, 열심인 듯 심드렁하거나, 매끄러워 보이는 사람이 까끌거리는 면을 숨기고 있다거나. 모순이나 불일치가 있어도 그것에 대해 관대하게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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