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는 국가수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바탕으로 파견된 수교국가에서 외교교섭은 물론 양국 간 문화 교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합니다. 주재국에서 대사는 곧 국가와 같은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에 대사의 말은 해당 나라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정보로 평가받습니다. <독서신문>은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의 일환으로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를 통해 각 국가의 문화·예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편집자 주> |
세계 경제 4위 독일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또한 EU(유럽연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주독 대사를 지냈던 영국의 외교관 폴 레버는 책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에서 “독일의 견해는 앞으로 20년 동안 어떤 국가가 EU 회원국이 될지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EU가 무슨 일을 할지 정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바 있다.
독일은 70여년 전 폐허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연달아 치르면서 국력을 모두 소진한 듯 보였다. 그런데 라인강의 기적과 통일을 이루면서 어느새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주변국에 여러 도움을 주는 유럽의 살림꾼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죄하고, 나치 잔당을 재판장에 세우는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과거 나치의 침략을 받은 국가들에게까지 신뢰를 받아내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것은 물론 학문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칸트와 헤겔, 니체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부터 괴테와 헤세 같은 대문호까지 모두 독일에서 나왔다. 2년 전 화이자 백신을 개발하는 데도 독일 기업 바이오엔테크가 한 몫을 톡톡히 했다. 이러한 독일의 탄탄한 학문적 배경 위에 해마다 발표되는 노벨상 후보에서는 독일인이 빠지는 법이 없다.
맥주, 벤츠, 축구하면 떠오르는 나라, 이밖에 우리가 모르는 독일의 매력이 또 있지 않을까. 이런 독일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24일 서울스퀘어에 있는 주한 독일 대사관에서 미하엘 라이펜 슈툴 주한 독일 대사를 만나 독일에 대한 이것저것을 물었다.
Q. 주한 독일 대사로 부임한지 올해로 3년째다. 소회를 밝힌다면…
“코로나가 한창 유행했을 때 한국에 대사로 부임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전임 독일 대사들이 느끼지 못했던 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세계는 팬데믹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 받고 있지만, 한국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혁신을 통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Q.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 또 한국에 대한 인상이 처음 느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아직 자가용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지하철을 많이 타고 다녔다. 한번은 서울역 방향의 지하철을 탄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금 있는 역이 어떤 역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역 정보가 담긴 안내판에 글자를 읽기 위해 가까이 갔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내가 안내판을 잘 읽을 수 있도록 자기가 쓰고 있던 안경을 빌려주셨다. 이 사건은 나에게 한국인의 친절함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지금까지도 한국에 대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타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친절한 사람들이다.”
Q. 아내가 주 필리핀 독일 대사라고 들었다. 아내를 만나면 한국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나.
“일단 우리는 자기 업무에 대해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같은 직업을 가진 부부가 그들의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다른 건 이야기하지 않는 건 어떻게보면 위험한 일이니까. 대신 매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한국에 어디를 갔고, 무엇이 인상적이었고, 어떤 걸 경험했는지를 나눈다. 특히 한국 음식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한국의 음식은 유럽의 음식과는 굉장히 다른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큰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Q. 어떤 음식들을 접했나. 가장 마음에 드는 음식 하나를 꼽자면.
“한국의 여러 국수 종류를 비롯한 삼겹살이나 갈비 같은 바비큐 종류의 음식, 여러 해산물들을 먹는 게 하나의 큰 재미다. 특히 나는 한국의 전복만큼 맛있는 전복을 먹어본 적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전복을 많이 먹어봤는데 그렇게 싱싱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국 수산시장에 가서 먹으면 싱싱하면서도 부드럽고 맛있는 전복을 먹을 수 있었다. 식당에서 파는 조개구이도 매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다. 한번은 동해안의 수산시장을 갔는데, 문어를 비롯한 여러 해산물들이 정말 질 좋은 상태로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Q. 한국에서 가장 모험적인 음식은 무엇이었나.
“삼합이다. 한국 사람들도 삼합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게는 그게 가장 특이한 음식이 아니었나 싶다. 두어번 정도 먹어봤는데 그정도면 이제 충분한 것 같다. (웃음)”
Q. 독일하면 맥주가 생각난다. 독일인의 몸에는 맥주가 흐른다는 얘기가 있을만큼 맥주 사랑이 크다고 들었다. 한국 맥주도 마셔본 적 있나.
“한국인의 몸에는 무엇이 흐르나?”
기자 : 글쎄.
“소주가 흐르지 않나 싶다. (웃음) 나도 한국 맥주를 좋아한다. 한국 맥주는 굉장히 다양해서 좋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맥주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제주도의 지역 맥주를 먹어본 적 있는데 그것도 굉장히 맛있었다.”
Q. 한국인들에게 독일은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곤 한다. 통일을 이뤄낸 점이나, 과거의 홀로코스트 범죄를 깊이 있게 사죄한 점, 역사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해낸 점에서 그렇다. 이 밖에 우리가 잘 몰랐던 독일의 매력이 있다면.
“우선 독일은 가족 복지 정책이 잘 갖춰져 있다. 독일은 부부가 경제적인 부담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있고, 여성이 꾸준히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과거 마이너스였던 출생률이 이제는 1.53 정도로 올랐다. 독일의 이주 정책도 눈여겨볼 만하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지금도 독일 전체 인구 중 25%(이는 출생 시 독일시민권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그 자녀가 포함된다) 정도가 이주 배경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데, 대표적으로 해외에서 유능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것과 문화적 다양성을 통해 독일 사회에 여러 다양한 의견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Q. 지난 2015년 난민 사태에서도 독일은 과감하게 난민들을 수용했는데, 어떻게 그런 결정이 가능했는지 놀라웠다. 난민들이 오는 게 꺼림직하지는 않았나.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가 질문을 하고 싶다. 왜 독일이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자 : 한국 사회에는 조금 낯선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낯선 사람들이 내게 해를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난민 수용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그건 어쩌면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지만, 유럽 역사에서만큼은 지난 수천년 간 계속 민족 이동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주라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모든 시민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고 본다. 정부는 이민자들이 사회에 녹아들 수 있게 어학 코스나 직업 채용 교육 같은 모든 시스템을 제공해야 한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원주민과 이주민이 서로 알고 만남으로써 친해지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시민 사회의 역할도 크다. 독일 같은 경우에는 시민들이 나서서 그런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일을 많이 했다. 참고로, 우리도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난민 사태 때 두려움이 가장 컸던 곳은 외국인이 가장 적은 곳이었다. 이주민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미디어로 비춰지는 위협적인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할 수밖에.”
Q. 반대로, 독일의 입장에서 한국에 배울만한 점은.
“한국은 문화 강국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BTS라든가, 블랙핑크 등의 아이돌 그룹, 오스카 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 넷플릭스에서 화제를 일으킨 여러 드라마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지 않나.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 등 특히 사회 비판적인 주제들을 다룬 작품들이 성공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사람들이 이 문화 콘텐츠들을 통해 사람들끼리 생각의 접점을 만들고, 이 접점들이 결국은 한 나라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비판적인 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이 되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앞서 유명 인물들을 언급했는데, 역사적 위인도 많이 알고 있나. 대사가 생각하는 한국의 역사적 위인들은 누구인가.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대중들이 글을 깨우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업적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또 이순신 장군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를 본 적 있는데 그가 했던 여러 작전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머리도 좋고 창의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군사 독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거듭날 수 있는 업적을 세웠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백남준 아티스트와 반기문 전 유엔 총장 또한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이다.”
Q. 독일인 중에는 칸트와 니체같은 유명 철학자도, 헤르만 헤세 같은 대문호도 있다. 뛰어난 사유를 펼친 천재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독일 사회의 특징도 있나.
“독일이 그렇게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사고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일에서는 사고의 자유가 헌법에도 보장이 돼 있는 것은 물론 그것이 현실에서도 정착돼 있다.”
Q. 최근 독일 사람들은 서점에서 어떤 책을 고르는지 궁금하다.
“독일의 베스트셀러는 ‘논픽션’과 ‘문학’으로 나뉜다. 먼저 논픽션에 대해서는 요즘 팬데믹에 관한 책들이 인기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은 사회 통합 문제라든가 소수자 혐오 표현 등의 사회 정치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가진다. 반면, 문학 작품 같은 경우에는 추리 소설이나 범죄 분야를 좋아한다. 사실, 이는 책이든 TV 프로그램이든 마찬가지다. 독일에서는 수십년 전부터 추리 소설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는데, 요즘은 넬레 노이스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눈알 수집가』가 가장 인기가 있다. 이런 추리 소설 안에서도 사회적인 주제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책 읽어주는 남자』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슐링크도 추리 소설로 시작한 작가다.”
Q. 한국인들 중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에서도 헤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또 대사로서 한국에서의 헤세 열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나도 18살부터 20살까지 『데미안』이나 『싯다르타』 등의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헤세가 던지는 질문들은 과거의 나를 비롯한 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자기 성찰을 격려한다.
Q. 독일 사회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소개한다면.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형제의 소설을 추천한다. 두 형제 중 토마스 만이 조금 더 유명한데, 그는 나치정권에 대항하며 여러 우수한 작품을 써냈다. 또한 당대의 문학‧예술‧철학‧정치 등 다방면의 사조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비록 토마스 만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울림을 준다. 한편, 하인리히 만 같은 경우에는 당대 독일 정권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소설을 썼다. 대표적인 게 『충복』이라는 소설이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 문제를 더 알고 싶다면 귄터 그라스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Q. 대사 본인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무엇인가.
“7~8년 전 즈음 스텐 내돌리의 『느림의 발견』이라는 소설책을 읽은 적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보다 생각이나 행동이 훨씬 느렸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함께 축구 같은 놀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느림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생각은 느리지만, 뭔가를 하면 끈기 있고 정확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훗날 탐험대장이 된 그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통과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의 판단이라면 극복하기 힘들었을 온갖 시련과 위기들을 본인 특유의 느리고 정확한 판단으로 헤쳐나간다. 이 책은 사람을 세상의 일반적인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약점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상황에서 얼마든지 강점으로 발휘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강점과 약점을 상이하게 갖고있다는 걸 인정하면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Q. 마지막으로, 임기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다면 한국의 책이나 물건 중에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나.
“지난 25년간 여행이나 출장을 통해 여러 국가들을 돌아다녔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물건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대신 머리에 무엇이 남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내 머릿속에는 한국이 매혹적인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국은 수십년 사이에 경제 강국으로 도약했고 독재 국가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한 나라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금세 잘 하게 된다. 나는 이런 한국인들의 열정을 늘 기억하고 살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아주머니의 따뜻하고 친절한 대접, 한국을 생각하면 계속 떠오르는 장면일 것 같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