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도로명 주소’,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
우리 집 ‘도로명 주소’,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12.29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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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도로명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이다. 청와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백악관은 ‘워싱턴 D.C. 펜실베니아 애비뉴 북서부 1600’이다. 이 밖의 여러 도시에서도 건물과 도로마다 주소가 적혀 있다.

체계화된 주소는 국민들에게 많은 편익을 가져다준다. 어떤 장소에서 화재나 범죄 발생 시 신고자가 그 주소를 불러주면, 소방서와 경찰서 입장에서는 현장접근이 쉬워진다. 또한 유권자 등록과 선거구 책정을 용이하게 해 민주주의가 증진될 수 있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소 체계가 국가 권력이 국민들을 더욱 쉽게 통제하기 위해 마련됐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조금은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디어드라 마스크의 책 『주소 이야기』는 주소에 담긴 권력과 정체성에 대해 주목한다. 이 책에 따르면 오늘날의 주소 체계는 300여년 전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오스트리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징집 명령을 내려도 좀처럼 병사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봉건 영주들은 힘센 농노는 숨겨놓고 약한 농노를 보내면서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의 테레지아 왕은 병력을 모으기 위한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모든 가구에 번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집집마다 그곳의 거주자 명단을 작성한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투가 가능한 모든 남자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이 찾아낸 장병들은 약 700만 명 정도였을 정도. 오스트리아의 징집 계획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주소를 통해 시민들을 감시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자크 프랑수아 기요테라는 경찰은 저서 『프랑스 경찰 개혁에 관하여』를 통해 파리 시민들을 감시하는 방법을 내놓았다. 여기서 기요테가 제안한 구체적 방법이 파리를 여러 지역으로 나눈 뒤 숫자를 매기고 도로명을 석판에 새겨놓는 것이었다. 나아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거리, 집, 계단, 층, 아파트, 심지어 말에도 번호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절 영국인들이 혁명주의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맨해튼 지역 건물에 번호를 매겼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인 도로명 주소가 고대나 중세에는 왜 고안되지 않았을까. 단순히 당대인들이 관심과 능력이 없어서였을까. 저자는 적어도 중세 시대까지는 주소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강했던 중세 시대까지는 그 지역의 통치자들이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을 파악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영주들의 세력이 약해지고 왕권이 강화되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중앙 정부가 국민 개개인을 찾는 현상이 잦아지면서 집집마다 주소를 매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소 체계의 정립은 국가 권력이 확대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점점 커져가는 자신들의 야심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군주들은 더 큰 오만함과 함께 과업에 걸맞은 국가 기구가 필요했고 자신의 왕국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했다”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통 도로명 주소를 순전히 기능적이고 행정적인 도구로 여기지만, 도로명 주소는 권력이 어떻게 이동하고, 수 세기에 걸쳐 연장되어 왔는지에 관한 장대한 서사를 품고 있다”고 말한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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