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에게 듣다] 정현우 시인 “사랑과 슬픔은 약속이 없다”
[명사에게 듣다] 정현우 시인 “사랑과 슬픔은 약속이 없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12.30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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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우 시인 [사진=최현식 PD]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올해 1월 출간한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로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에 선정되며 탄탄한 독자층을 확보한 시인 정현우. 그가 최근에 첫 산문집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를 펴냈다. 첫 시집의 해설서처럼 느껴지는 이 책에는 약속도 없이 찾아오고, 기약도 없이 떠나간 사랑을 견디고 버티는 단단한 사람의 연약한 마음이 담겨 있다.

빛은 빛에게 약속한 적이 없지, 빛은 빛이듯이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나를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 그대를 사랑할 수 있겠다.
- 정현우, 「그냥」 中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는 시인이 유년 시절에 썼던 일기장이 초고가 된 작품이다. 소년의 아픈 숨결이 서려 있는 문장들은 독자들의 마음에 사랑과 슬픔의 부도탑을 쌓아 올린다. 사람과 사랑으로 인한 생채기에 잇따라 생이 흔들려도 굴복하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 슬픔에 젖은 존재들의 눈동자와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이 책에서 정현우가 표상하는 이미지들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겨울날에 그를 만났다.

Q. 최근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로 선정됐다.

“운이 좋았다. (웃음) 첫 시집을 송혜교, 김소연 등의 배우님들이 읽고서 SNS로 홍보해주셨는데, 아마도 그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Q. 첫 에세이다. 시를 쓸 때와는 어떤 점이 달랐나.

“시는 에세이보다 리드미컬한 글이다. 리듬에 맞추려면 글을 압축해야 한다. 하지만 에세이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그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다. 또 시는 작가가 시 속으로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게 시인의 이야기가 맞나?’ ‘그게 아니면 누구 얘기지?’ 등과 같이 독자들을 긴가민가하게 만들 수 있다. 시 쓰기가 물 위에 집을 짓는 거라면, 산문 쓰기는 땅 위에 집을 짓는 일이다. 시보다는 산문이 현실적이니까. 물 위에 떠 있을 때가 아닌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때 감각할 수 있는 일들을 풀어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숨을 공간이 없더라. (웃음) 어디까지, 얼마나 솔직해져야 하는지 고민했다.”

Q. 일반적인 에세이보다는 상징적이어서 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에세이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쓴 일기가 바탕이 됐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윤동주와 릴케 시집을 사주셨는데, 그 책들에 대한 감상을 일기에 대충 써 내려간 게 이번 에세이의 초고다. 시에 대한 글이다 보니 그렇게 상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에세이를 써봤는데, 그게 나랑 맞지 않더라. 사람들에게 조언하듯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주고 싶었다.”

Q. 첫 시집인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와 묘하게 이어지는 것 같다.

“최진영 소설가님이 첫 시집과 이번 에세이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오누이’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다. 시집보다는 에세이에 나의 근원적인 이야기가 더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집을 잘 이해하려면 에세이를 먼저 읽어야 한다. 시에 담지 못했던 말들을 에세이에 담았다.”

Q. 기억에 남는 독자의 반응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게 자랐냐는 거고. (웃음) 다른 하나는 안아주고 싶다는 반응이다. 유년 시절에 아주 가난하고 힘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형편이 나아지긴 했는데, 그런 결핍으로 인해 이런 글들이 나올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느끼는 기쁨이 어쩌면 어렸을 때의 슬픔 때문에 가능할 수 있겠구나 싶다.”

Q. 독자가 작가를 위로하고 싶은 책이 있다. 그런 맥락의 반응이 아닐까.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독자분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나 보다.”

Q.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라는 제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원제는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 없나’였다. 근데 코로나 시국에 너무 슬픔만 얘기하면 사람들이 읽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편집자님과 고민하다가 내가 이 책에 썼던 「그냥」이라는 글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할 때 약속 없이 하니까. 사람들이 봤을 때 무릎을 칠 만한 그런 구절인 것 같아서 제목으로 정했다.”

Q. 책에서 “사랑이 최선의 약속이다”라고 적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고,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로 생각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약속도 없이 찾아오지만,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발화하는 것은 그 순간에 대한 약속인 셈이다. ‘널 사랑해’ ‘너를 생각할 거야’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해’ 등의 말들로 곁에 있는 상대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게 일종의 약속인 거다.”

Q. 이번 책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은 무엇인가.

“라디오에도 많이 소개됐는데, 독자분들은 병아리 키우는 얘기를 담은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좋아해 주시더라. 다들 어렸을 때 병아리를 키워본 추억이 있어서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나는 「엄마」라는 글을 좋아한다. 시처럼 짧은데, ‘세상에서 가장 짧게 부를 수 있는 / 슬픔’이 내용의 전부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엄마’이기도 해서. 이 글이 머릿속에 맴돈다.”

Q. 개인적으로 「동주의 눈」이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시인 윤동주가 아닌 청년 윤동주에 대해 깊이 감화된 느낌이었다.

“윤동주의 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주변적인 일들에도 관심이 가지 않나. 윤동주가 오래 살지 못했다. 결혼도 못 했고, 당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짧은 생을 살다간 윤동주가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시를 쓰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들을 했을까. 그런 상상을 한다. 이 글은 그런 상상에서 비롯됐다.”

Q. 살다 보면 다양한 상실을 경험하지 않나.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나.

“극복이라기보다는 끝없이 애도하는 마음을 갖는 것 같다. 애도를 하면서 내 안에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서서히 놔주는 것 같다. 이제는 죽고 없는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애도를 한다. 애도는 망각하는 게 아니라 상실한 존재를 옅게 존재하게 한다. 사라져가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 그러면 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두 눈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애도를 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Q. ‘엄마’라는 소재가 많이 등장한다. 당신에게 엄마는 무엇인가.

“첫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를 출간했을 때, ‘천사가 누구야?’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천사의 모습은 다양하다. 시작은 엄마였다. 또 나랑 친했던 친구이기도 하고, 내 유년 시절을 함께한 고양이 묘묘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할머니도 천사다. 천사의 모습이 이처럼 다양한데, 그 모습들을 산문에다가 보여주고 싶었다.”

Q. 이에 반해 ‘아버지’는 자주는 아니지만 ‘깊게’ 등장하는 것 같다.

“많은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끝내 이해해야 하는 존재이지 않을까. 나의 아버지는 내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쓰는 삶을 살게 해준 어떤 씨앗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애증의 관계인 거지. 에세이를 쓰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미운 적이 많았다. 왜 저렇게 술을 먹고, 엄마를 힘들게 할까… 근데 성인이 되고 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 시신 앞에서 엎드려 울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됐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아버지를 보내는 날이 올 텐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연필을 꾹 눌러쓰는 심정으로 썼다.”

Q. “내가 없는 그대가 더 많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은 소유하려고 할 때 끝나버리는 것 같다. 슬픈 얘긴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정말 사랑하지만, 한 사람으로서 인정해주는 게 먼저다. 쉽지 않지만, 사랑을 할 때는 소유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Q. ‘사랑’과 ‘슬픔’의 감정을 얘기하는데 왜 지금이 아닌 유년 시절의 시간이 필요했나.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유년 시절이 아주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어른이 되더라도 계속 남아 있는 거니까.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그때 그 순간들이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삶을 살아갈 때, 앞을 내다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도 중요하다. 나의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이 책을 쓰면서 많이 상상했다.”

Q. 뒤늦은 질문인데, 주로 언제 글을 쓰나.

“시 같은 경우에는 휴대폰으로 많이 쓴다. 집이 평택이라 기차로 서울을 오가며 쓴다. 기차 안에 있을 때 들려오는 특유의 소음이 있는데, 그때 뭐가 잘 떠오른다. (웃음) 그리고 자주 가는 카페가 몇 군데 있다. 분위기가 다 다른데, 밝은 시를 써야겠다, 어두운 시를 써야겠다, 슬픈 시를 써야겠다 등 내 다짐에 따라서 장소가 달라진다. 글을 쓰는 장소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장소를 자주 바꿔가면서 글을 쓴다.”

Q. 다음 책은 시집인가.

“그렇다. 두 번째 시집은 아마 우주적인 것들을 얘기하지 않을까 싶다. 우주와 관계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시로 풀어내고 싶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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