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토를 다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그러니까 어른의 말에 덧붙여 당돌하게 질문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젊은이의 행위를 ‘예의 없음’으로 간주한다. 대신에 “네” “예” “알겠습니다”를 대화의 미덕으로 여긴다. 이른바 ‘질문이 빈곤한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변화, 정의, 대안은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목소리를 판별할 수 있다.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교수인 강남순은 책 『질문 빈곤 사회』에서 “‘왜?’라는 물음표를 허용할 때, 진보와 변화가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회의 각 영역에서 진실을 호도하는 세력을 향해 거침없이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질문’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그는 “현실 세계의 변화는 단순한 해답을 가져오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고 설명한다.
질문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묻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기자다. 기자는 질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일부 기자들은 ‘기레기’ ‘기더기’ 등의 멸칭으로 불리며 질문하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0년 9월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상황이 대표적 사례다.
이에 대해 강남순은 “왜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인가. 질문하기가 삶의 방식이어야 하는 저널리스트조차도, 왜 제대로 질문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며 “‘누가 질문권을 행사하는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질문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것은 공적 영역에서 ‘발화의 주체’로서 등장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기자가 현안에 대해 합당한 시각으로 적극적으로 질문할 때, 그가 소속된 국가의 공적 위상은 올라간다.
나아가 기자는 적극적인 질문에 이어 ‘올바른 질문’과 ‘나쁜 질문’을 제대로 판가름할 수 있어야 한다. 강남순에 따르면, 나쁜 질문은 ‘예’와 ‘아니오’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질문 자체가 잘못된 전제를 기초로 구성된다. 그는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에게 종종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나쁜’ 질문의 전형”이라고 비판한다.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이 왜 나쁜 질문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은 ‘찬성’과 ‘반대’ 즉 ‘예’와 ‘아니오’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쁜 질문이다. 강남순의 지적처럼, 이러한 질문은 질문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사유나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둘째, 이 질문은 인간의 성적 지향을 찬성과 반대의 문제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쁜 질문이다. 성적 지향은 찬반의 영역이 아니다. 주체적인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강남순은 “잘못된 질문‧나쁜 질문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 것은 커다란 사회정치적 손실”이라며 “훌륭한 지도자, 훌륭한 저널리스트, 훌륭한 사상가들은 모두 해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다. 좋은 질문‧올바른 질문은 질문자의 폭넓은 리서치와 지속적인 성찰을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말한다. 좋은 질문이 부재한 사회는 더 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사회이다. 좋은 질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필요한 시점이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