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이 쓴 역사서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간명하다. 그는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시간 순서로 죽 벌여 놓는 게 아니라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일러 준다. 그래서 그의 역사책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이다. 역사를 ‘이야기’라는 운송 수단(vehicle)에 실어 나르기 때문에 ‘문학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다.
동시에 유시민은 역사 자체를 ‘기록’이 아닌 ‘이야기’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훌륭한 역사서는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출발해 그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과학의 힘을 빌리고, 마지막에는 규명된 사실들을 맥락화해 한편의 이야기로 귀결한다. 기록으로 시작해 과학을 품에 안고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 문학으로서의 역사. 유시민이 말하는 훌륭한 역사서의 덕목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도 훌륭한 역사서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 특히나 이 책이 빛나는 이유는 역사라는 심원한 바다에 존엄한 삶을 살다간 인간들의 발자국을 띄워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의 생애는 언어로 산출할 수 없는 감동을 안긴다. 지난달 15일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 재출간 기념 인터뷰를 위해 돌베개 출판사 1층 카페에서 유시민을 만났다.
Q.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당신의 말처럼 새로운 책이 아니다. 1988년에 초판을 출간했고, 1995년에 개정판을 냈다. 이 책을 지금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독자들의 요구가 좀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과거의 책이 미흡한 것 같아 개선해서 내고 싶은 욕심이 났다. 예전에 써놓은 글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왜 이렇게 밖에 못 썼는지. (웃음) 글 쓰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Q. 과거의 글이 미흡해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데 의미를 두는 작가들도 있는데.
“소설이나 시는 그럴 수 있다. 근데 내 책은 예술 작품이 아니고 일종의 보고서(report)다. 보고서는 지속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Q.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 『역사의 역사』 등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썼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나.
“부친이 역사 선생님이었다. 그런 환경 영향 덕분에 어릴 때부터 역사책을 많이 읽으면서 역사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 갈 때 역사학과를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판단을 잘못했다. 나로서는 엉뚱한 전공을 한 셈이다. 역사학을 전공했으면 이 책을 좀 더 잘 쓸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Q. 책에는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 사건들이 담겼다. 왜 하필 이 사건들인가.
“어떤 현대사 책을 봐도 대개 이 사건들은 빠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중대 사건으로 인정하는 사건들 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좀 더 끌리는, 말하고 싶은 사건들을 골랐다.”
Q. 첫 챕터로 다룬 사건이 19세기 말 유대인 출신 프랑스 군인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난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고 말했는데.
“나도 가끔은 문학적인 표현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웃음) 고상하게 표현하면 문학의 향기인 거고, 대놓고 얘기를 하면 마치 지어낸 얘기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이라는 거다. ‘세상에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라는 놀라움을 안겨주는 그런 요소들이 이 사건에 많이 있다. 누가 지어내도 이렇게 지어내기는 어렵겠다는 그런 느낌. 그 느낌을 나름 좀 멋지게 표현한다고 그렇게 썼다. ‘드레퓌스 사건’이 특히 그렇다.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창작한 소설이라고 해도 정말 기가 막히게 창작했다는 느낌이 든다.”
Q. ‘유시민의 역사’에 문학의 향기가 풍겼던 순간은 언제였나.
“내 인생에는 그런 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다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니까. 현실에는 훨씬 더 극적이고 변화가 많은 삶을 사신 분들이 있다. 내 경우는 젊었을 때 정치적으로 좀 박해를 받았다든가 그런 수준이지 심한 기복을 겪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Q. 상대적으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챕터에서는 정보 전달과 해석을 넘어 강경하게 ‘주장’하는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전쟁’은 대한민국이 관여된 전쟁이었다. 그러다보니까 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에 관해 해석할 때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면이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마치 정당한 전쟁에, 정당한 이유로 참여한 것처럼 말해왔다. 나는 이 챕터에서 그런 해석과 시각이 옳지 않다는 점을 좀 강조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다소 다른 장에 비해서는 나의 주장이 좀 더 들어갔을 수는 있다. 나는 의식을 못하고 썼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Q. 유일하게 물음표로 끝나는 챕터가 ‘대공황’에 관해 서술한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이다. 이 챕터를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라고 마무리했는데.
“그건 아마 내가 경제학을 전공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아는 게 많으면 신중해진다. 역사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태도와 비슷하다. 약간 다른 얘긴데,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이 책을 제대로 쓴 역사서로 봐주지 않는다. 자기 이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적인 역사 해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기본적인 사실들을 잘 엮어서 대중에게 전달한 보고서 같은 것으로 볼 것이다. 별로 논평할 게 없는 거다. ‘사람들이 재미있으니까 많이 읽나보다’ 그런 정도겠지. 나 역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초판본은 진짜 무식해서 용감하게 쓴 책이다. (웃음) 근데 ‘대공황’에 관한 부분은 내가 경제학 전공이니까 역사학보다는 아는 게 많으니 아무래도 덜 용감해져서 여지를 남기고 쓰지 않았을까.”
Q. ‘대공황’ 챕터와 관련해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파괴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 또는 시장 경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질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좋은 것 혹은 모든 나쁜 것이 전부 자본주의 때문에 그런 거로 생각한다. 근데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조리들 중에 어떤 것들은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했던 것도 있다. 우선 그걸 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을 파괴하는 온갖 것들이 다 자본주의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가 문제가 많지만 버릴 수 없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고 탄생한 게 사회주의였는데 인간들이 해보니까 자본주의보다 더 못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 이상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채택한 게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보다 나은 세상의 질서를 못 찾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그러면 지금 제도를 등에 업고, 심각한 문제점들은 손 봐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
Q. 그럼 지금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손 봐야 할까.
“자본주의가 대공황 때문에 망할 거라고 했는데 안 망했다. 왜냐하면 중앙은행 제도를 도입하고, 경기 조절 정책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 관련 법규를 제도화하면서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 때문에 망하지 않게 대처법을 강구했다. 그럼 이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거나 혹은 끝나게 될까. 추측의 영역인데, 결국은 기술 발전 때문에 새로운 세상의 질서가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사용자가 근로 계약으로 노동자를 고용해서 노동을 시키는 그런 시스템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고.”
Q. 노동시장의 풍경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거라는 얘긴가.
“그렇다. 환경미화원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또한 생산은 다 로봇이 하고 사람은 사람이 반드시 개입해야 공급되는 서비스 쪽으로만 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대규모 사업장에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아침 9시까지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이 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면 미래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채택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시스템하고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Q. 20세기의 가장 큰 혁명적 사건으로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을 꼽았다.
“종이의 발명이 대단히 큰 변화를 몰고 왔다. 그 다음이 인쇄술의 발명이다. 바로 금속 활자다. 이게 가톨릭의 천년 지배를 무너뜨렸다. 종이와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이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근데 종이와 인쇄술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게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이다. 정보 유통 비용을 거의 제로로 떨어뜨리는 사건이다. 지식 유통이 아무런 비용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혁명적이다. 비단 비용만 줄인 게 아니다. 지식을 직접 가공하고 활용하는 데에도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화됐다. 이제는 컴퓨터에 인공지능까지 연결되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컴퓨터가 할 수 있다. 이게 진짜 혁명이다. 이 혁명은 아직도 완결된 것이 아니다. 시작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누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단연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이라고 말할 것 같다.”
Q. 살짝 분위기를 바꿔보자. <독서신문> 대학생 기자단이 뽑은 질문이다. 역사적 인물 한 명을 환생시킬 능력이 주어진다면, 누구를 환생시키고 싶은가.
“과거의 자질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동일하게 성장한다는 전제를 둔다면 장영실 선생을 살려내고 싶다. 나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천재적인 과학자가 장영실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지금 태어난다면 대한민국의 과학 기술을 세계의 선두권으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관노의 아들이었는데, 종3품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왕의 가마 손잡이가 부러졌다고 곤장을 맞고 사라졌다. 그가 왕조 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인류 문명 최고 수준의 과학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한 분을 더 살려도 되나?”
Q. 누군가.
“세종대왕이다. 한글을 만들어 주셔서 너무 고맙다. (웃음)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가장 훌륭한 일을 한 왕을 꼽으라면 나는 세종대왕을 꼽고 싶다. 한글은 정말 위대하고 과학적인 발명이다. 특히 나처럼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은 세종대왕님이 최고다. (웃음)”
Q. 이 책에 우리나라 역사를 하나만 추가한다면.
“원래 초판에는 ‘4.19 혁명’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에 자세하게 썼기 때문에 이번 책에서는 뺐다. ‘4.19’는 최초로 민중이 궐기해서 권력자를 내쫓은 사건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세계에 본보기가 될 만한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데, 그 출발이 바로 ‘4.19’다.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Q.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는데, 현재 시점에 유념해야 할 역사적 사실을 상기한다면.
“너무 많다. 어느 하나를 뽑을 수 없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이 안 달라져서 그렇다.”
Q. 왜 그런가.
“제대로 된 체계와 이론을 갖춘 역사서로 사마천의 『사기』를 많이 꼽는데, 그 책이 3천 년이 다 돼 간다. 그러니까 인류가 기록에 남은 건 기껏해야 3천 년 정도 밖에 안 된다. 3천 년 전에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생물학적으로는 똑같다. 생물학적 DNA가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패턴의 행위를 반복하는 거다. 그러다보니까 권력자들의 행태도 반복되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양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인류가 과거와 비슷한 오류를 저지른다고 가정하면, 그 오류의 정도가 좀 덜 파괴적이고, 덜 흉악한 쪽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Q. 역사의 수레바퀴는 때론 덜컹거리기도 하지만 계속,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가 계속 진보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히 폭력성이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폭력성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들을 많이 만들어서 폭력성이 덜 나타나는 사회로 변모했다. 우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70년 넘게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없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군대,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폭력성의 정도가 이전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교육을 해서 나아진 거다. 우리가 우리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발견하고, 직시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발전이 있다.”
Q. 역사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다. 유시민이 정의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이야기다.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인간의 삶의 양식과 사람들의 관계가 변화해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역사다. 사전은 역사를 ‘기록’으로 정의하는데, 역사가 기록으로 출발하기는 한다. 하지만 훌륭한 역사란 기록된 사실들을 온전하게 규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을 껴안고, 과학을 품에 안은 사실들을 맥락화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종국적으로 문학이다. 모든 역사가 다 문학인 것은 아니지만 최상의 역사라는 것은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내 말이 아니고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기록된 역사서가 잘 쓴 역사서일 수는 있지만, 훌륭한 역사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훌륭한 역사서는 지식과 교양을 넘어 깊은 감동을 준다.”
Q. 지금 국민들에게는 어떤 책을 추천하고 싶나.
“과학 교양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인문학 관련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과학책이 훨씬 우리 자신과 삶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내가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한 이후로 주로 문학, 철학, 경제학, 역사학 등 인문학만 공부하면서 살았다. 근데 그 공부가 내가 하나의 생물로서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탐구한 것들이더라. 과학책은 그런 것들을 재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