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환자용 간이침대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엉덩이 두 쪽을 잡아 벌린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볼일을 마치고 제대로 닦아내지 않았음을 눈과 냄새로 알아차린다. 그렇다. 그는 아예 닦지 않았다. 치질과 항문 가려움증으로 의사를 찾아가 진료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왔다.<13~14쪽>
그녀를 귀찮게 하지 마. 토레가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구석에 서 있는 낡은 플라스틱 해골과의 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잠시 후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마음속으로만 했지만 흡사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25쪽>
종업원이 맥주 두 잔을 가져오자 건배를 했다. 비에른에게는 두 번째, 나에게는 네 번째 잔이었다. 비에른은 잔을 박력 있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야.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네. 우리 사이는 섹스도 없어. 그러니까 내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5년이 넘도록 함께 잠을 자지 않아.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도 정확히 기억해. 바로 5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였어.”<110쪽>
“제가 어디서 읽었는데요. 독한 소주는 알츠하이머 예방에 좋대요. 제가 환자분이라면 소주를 더 많이 마실 것 같아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동시에 맥주도 충분히 마셔줘야 한다는 걸요. 아시다시피 맥주에는 비타민B가 풍부하니까요. 특히 생맥주에 해당되는 말이니 알아두세요.”<125~126쪽>
“예를 들어, 초록색 쓰레기봉투를 걸어야 하는 통에 파란색 쓰레기봉투를 걸면 그녀는 몇 초 안에 몬스터로 변신하지. 나는 종종 눈물이 나기도 해. 그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이 슬퍼서. 그녀가 알아챌 정도로 울지는 않아. 그러면 더한 난리를 피울 테니까. 보통은 지하 운동실로 내려가 90년대 기구 위에 앉아 울부짖어. 새빨개진 얼굴로 올라오면 그녀는 내가 운동을 했다고 생각해.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은 잠시 동안 다정해져. 정원 호스가 제대로 감겨 있지 않거나 벤치 쿠션이 실내로 들여지지 않은 모습을 보기 전까진.”<167쪽>
[정리=전진호 기자]
『바람난 의사와 미친 이웃들』
니나 리케 지음 | 장윤경 옮김 | 팩토리나인 펴냄 | 400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