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손 닿는 곳엔 늘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손 닿는 곳엔 늘
  • 스미레
  • 승인 2021.10.12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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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면 누구나 작가가 된다고 한다. 새로운 삶과 함께 쏟아지는 한탄과 감탄, 정신 승리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남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니 말이다.

나도 그랬다. 임신을 알게 된 날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쓰지 않은 날이 없다. 아이가 자랄수록 기록할 거리가 많아지니 점차 많은 것을 쓰게 되었고, 쓰기는 나의 루틴이 되었다.

아이 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매일 ‘아침 편지’를 써줬다. 처음엔 엄마, 아빠 같은 간단한 글씨를 익히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아이의 반응이 열렬했고, 도톰한 노트를 마련하게 되었다. 아이가 잠들면 쓴 편지를 식탁 위에 펼쳐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드는, 산타클로스 같은 매일이었다. 날씨 이야기, 오늘 할 일, 어제 읽은 책 이야기, 사과와 반성, 사랑한다는 말… 그날그날 짧게 써준 것이 여러 권의 노트로 남았다.

아이는 아침마다 편지를 읽고 배시시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내 마음에서 나온 언어를 제 마음으로 옮겨 넣는 그 모습이 참 예뻤다. 게다가 짧은 답장을 남기기도 했으니, 엄마의 편지는 아이가 한글을 떼는 데도 그 몫을 단단히 했다.

남편도 종종 나와 아이에게 편지를 남기곤 했는데, 아빠의 편지를 아이는 이벤트처럼 좋아했다. 나 역시 남편의 씩씩한 글씨에 힘을 얻곤 했다.

받아본 사람이 줄 줄도 안다고, 아이도 편지 쓰기를 즐겨한다. 편지 쓰는 엄마 뒷모습 보며 자란 아이니까, 언젠가는 힘들어하는 이에게 다정한 쪽지 한 장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도 가져본다.

그렇게 손 닿는 곳엔 늘 노트가 함께였다. 첨단에 밝은 편은 못 돼서, 패드를 두드리는 것과 종이에 펜을 눌러 쓰는 데는 차이가 있다고 여긴다. 이 낡은 방식을 고집하느라 지난 몇 년간 셋째 손가락이 울퉁불퉁 미워졌다. 그러나 거기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썼던 핸드폰과 메모리 카드는 쉽게 사라지고 고장 났다. 앱 비밀번호는 왜 또 그리 쉽게 잊어먹는 건지. 핸드폰과 디지털카메라가 편하긴 해도 그리 믿을 만한 아카이브는 못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임신 때부터 써 온 수십 권의 노트는 건재하다. 지금도 책장 한 칸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아이가 빼 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아기 하는 양, 아기 하는 말. 나중에 다 기억날 것 같지? 그런데 지나면 기억이 안 나더라. 네가 했던 말들, 남긴다고 남겼는데도 아쉬워. 너도 부지런히 써 놔. 어차피 아기는 기억 못 해. 지나고 나면 너만 아쉬워.”

엄마 말은 사무치도록 사실이었다. 한 철이 지나면 아기는 또 자라 있었고, 그때의 엉성하고 귀여운 모습을 다시는 보여주지 않았다. 잊지 않으마 자부했던 것마저 쉽게 잊혀졌다. 얘가 몇 개월 때 뭘 했더라? 는 고사하고 어제 뭘 했더라? 도 가물가물해지는 게 현실이었다.

친정에는 내가 아기였을 때 목소리를 녹음해 둔 테이프가 있다. 시어머님께서는 남편의 일기를 엮어 ‘반딧불’이란 책으로 만들어두셨다. 우리의 보물이 된 이 테이프와 책들을 보며 생각했다. 부모에겐 자녀의 어린 시절을 저장하고 넘겨줄 의무가 있구나. 귀찮아도 부지런히 기록해야겠다. 기록을 이기는 기억이란 없으니까.

아기들은 한순간 우리 곁을 스쳐 간다. 오늘의 아이는 어제의 아이와 결코 같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토록 애틋하며, 추억이 많은 엄마는 행복한 것이다. 이제 나는 피곤에 무너져가면서도 끝내 무언가를 쓰던 내 미련한 뒷모습을 용서한다. 아이의 기록을 남기던 내 모습이 내게도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연중무휴 쓰기의 이유는 엄마된 책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서, 혹은 내 안에 보드라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반성과 한탄을 잘라내고 싶어서. 그런데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는 그 반성문 속에서 나를 구원할 또 다른 길이 보이곤 했다. 그 모든 한탄의 기저에는 ‘이런 나대로 잘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볕이 좋고 아이의 모든 말이 고운 시절이다. 타이핑을 멈추고 아이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뭘 좋아했는지 생각한다. 오전에 커피를 내리며 즐거웠던 기분, 냉장고를 털어 집밥을 지어 먹은 나의 장함도 더듬어본다. ‘해주지 못한 것’이 아닌 ‘한 것’에 촛점을 맞추자 하루가 말끔해졌다.

아이가 ‘엄마는 왜 항상 뭘 쓰는지’를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아이에게 손편지 노트를 선물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생각난 김에 아이 가방에 넣을 편지를 써야겠다. 책 쓰느라 바빠진 엄마를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정말 힘이 난다고.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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