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⑨] “할아버지가 들려준 수많은 얘기가 삶을 지탱해줬다”… 한승원의 『산돌 키우기』
[문학기행 ⑨] “할아버지가 들려준 수많은 얘기가 삶을 지탱해줬다”… 한승원의 『산돌 키우기』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9.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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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글을 읽고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상상을 실제 상황과 맞춰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이지요. 저자가 처했던 상황, 시대 배경 등에 대한 이해는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됩니다. <독서신문>이 근현대 문학 배경지를 찾는 기행을 시작합니다.

■ 시리즈 기사 연재 순서
“누가 나라를 뺏기라고 했나”... 문학기행 ① – 조정래의 『아리랑』
“생명의 땅 평사리는 인간의 탐욕을 나무라지만”... 문학기행 ② – 박경리의 『토지』
“쓸모없어야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야 쓸모가 있다”… 문학기행 ③ – 조두진의 『북성로의 밤』
“절대 고독에서 만난 반가움과 사랑” 문학기행 ④ – 변경섭의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린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문학기행 ⑤ – 심훈의 『상록수』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 문학기행 ⑥ –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
‘백마 탄 초인’은 온 걸까… 문학기행 ⑦ – 이육사의 『광야』
“1936년 열일곱 동갑내기의 풋내나는 사랑 표현법은?”… 문학기행 ⑧ 김유정의 『동백꽃』

수문해수욕장 [사진=플랫컴]

전남 장흥군 안양면에는 수문해수욕장이라는 곳이 있다. 백사장 뒤편에는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고, 해변의 한쪽에는 억새밭이 아름다운 일림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담수(湛水)가 고여 있다. 일제강점기 때, 나환자들을 소록도로 데려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다가 더위에 지친 일본 관료들과 나환자들이 이곳에서 몸을 씻고 병이 완치돼 해수욕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만약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이곳은 사람을 구원한 바닷가인 셈이다.

좋은 문학도 사람을 구원한다.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의 지난한 삶의 과정에 동행하며 자신들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참된 문학에는 심오한 사상이나 철학이 아닌 좌절을 경험한 인물들의 사사로운 마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상을 염원하지만, 현실에 발을 떼지 않는 것이다. 특히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학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 따위가 답안지처럼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험난한 과정이 있을 뿐이다.

한승원 작가 [사진=플랫컴]

수문해수욕장에서 4km 남짓한 거리에 한승원문학학교가 있다. 뒤로는 한덕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수문항의 푸른 물빛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서 한승원은 여전히 ‘산돌’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저마다의 산돌을 키운다. 나쁜 짓을 하면 산돌이 자라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말을 믿고, 애지중지하며 보살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산돌이란 물리적으로 자라는 돌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먹고 크는 마음속의 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산돌을 키운다는 것은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치기 어린 행동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에게는 꼭 필요한 자세이리라. 올해로 등단 55주년을 맞은 한승원은 “망구(83세)의 나이인 나는 내 토굴 뜨락에 산돌 하나를 묻어놓고 키운다. 그 돌이 내가 저세상으로 떠나간 다음에 보라색 자색의 유리 기둥처럼 자라기를 희망하며”라고 자신의 문학 인생을 오롯이 담은 책 『산돌 키우기』에 적었다.

내 자리는 교실의 남쪽 가장자리 줄의 중간쯤에 있었는데, 하얀 햇빛 한 자락이 책상 위를 점거하고 있었다. 선생은 바야흐로 구구법을 이용한 곱셈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게 창밖에 있었다. 텅 빈 운동장 바깥 구석에 회전그네가 멈추어 있고, 그 너머로 펼쳐진 짙푸른 바다에는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눈부신 하얀 빛 조각들이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수천수만의 물고기들이 떠올라 퍼덕거리는 듯싶었다. 그 번쩍거리는 것들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산돌 키우기』 中

한승원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내 고향 남쪽바다』 『해변의 길손』 『해산 가는 길』 등 바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많이 썼다. 한강 작가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그는 1996년 고향 장흥으로 내려와 현재 한승원문학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한강 작가는 『산돌 키우기』에 대해 “그가 섬세하게 추려낸 기억들로 세운 이 책은 유년 시절 아버지가 꿈속에서 키웠다는 산돌의 유리 기둥들을 닮았다”며 “이 책 속에는, 어릴 때부터 들어왔으므로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내가 소설로 썼거나, 쓰는 중이거나, 앞으로 쓰려고 계획해온 이야기들도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다시 태어났고 자랐고 살았던 것이다. 이 페이지들 사이에서”라고 말했다.

한승원문학학교에서 바라본 남해의 풍경. [사진=플랫컴]

지난 8일 한승원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KTX를 타고 광주송정역에 내려 차를 몰아 그가 있는 장흥으로 갔다. 곧 아흔을 바라보는 그는 91년생 기자에게 “기자님”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러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율무를 우린 물에 스위스산 차(茶)를 태워 주었다. 심심하면서도 달짝지근한, 오묘한 맛의 차였다. 문학학교 너머로 보이는 남해의 풍광은 차의 맛을 더욱 깊게 해주었다. “여기 있으면 글이 절로 써질 것 같아요”라는 기자의 철없는 말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양산댁의 눈에 물이 괴고 있었다. 석주는 양산댁의 저고리 앞섶을 움켜쥔 채 바닷물이 흘러들어 쓰린 눈알을 껌벅거렸다. 여우같은 양산댁이 또 자기를 꾀고 있다 싶었다. 양산댁을 물속에 처넣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멍청히 양산댁이 바라보는 먼바다의 한 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 바다에는 한가로운 잔물결의 이랑들이 햇빛을 받아 금빛 고깃비늘처럼 반짝거리고, 그 반짝거림 속에 오징어잡이 배들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목선」 中

정연희 교수는 “한승원의 소설에서 ‘바다’는 ‘거의 원래 모습’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생생한 자연’으로 나타나며, 생태적 의미와 가치를 포지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바다 속에 사는 인물들과 인물들 속에 사는 바다로부터 생태적 감수성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한승원의 생태적 사유를 ‘비인간중심주의적 사유’ ‘친숙한 장소를 중심으로 한 장소감각’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부드럽게 인식하는 여성성’으로 정리한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유와 감각은 ‘바다’와 직접 접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온 인물들과 그런 그들의 삶의 태도에 입각하여 어두운 죽음의 역사를 견디고자 했던 한승원의 문학세계에서 이미 예상되는 특징들이다. 한승원의 문학이 생태문학으로서의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진 문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다’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애착이 어느 결에 생태적 감수성과 의식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우리는 관찰하게 된다”고 평했다.

[사진=플랫컴]

한승원에게 고향 장흥은 자신의 문학적 토대이다. 그는 “나는 장흥의 생태적인 것, 말하자면 장흥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것을 먹으며 성장했다. 그것을 우주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부모님에게 효도하듯이, 장흥을 위해서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 내가 평생 소설을 쓴 것은 그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아보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맹신해왔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에 대하여 의혹을 가지기 시작했다. 리얼리즘을 신앙처럼 가지고 사는 후배 평론가가 그 기미를 알아채고 말했다.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가가 신화 쪽을 기웃거리는 것은 리얼리즘 소설의 죽음입니다.” 그는 나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신화적인 냄새를 내 소설의 위험 요소로 본 듯싶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 생각은 후진적인 것이다. 이제는 환상적인 리얼리즘과 우주주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융합(혹은 통섭)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산돌 키우기』 中

수문해수욕장 근처에 조성된 한승원 문학 산책 길 [사진=플랫컴]
한승원 문학 산책 길에 세워진 비석 [사진=플랫컴]

한승원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윤리’로 꼽는다. 이 말은 허황된 명분과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탐욕의 마음 없이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과 맥이 닿아있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윤리는 ‘인간다움’이다. 나는 그것을 우주주의라고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윤리를 외면한 문학은 존재 의미가 없다”며 “소설가가 쓰는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윤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형이 졸업한 다음 자유로워진 나는 문학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착하게 공부하던 학생이 학과 공부를 멀리하고 시, 소설 공부로 빠져드는 것을 문학병이라 말했다. 『산돌 키우기』 中

한승원문학학교 뒤편에 있는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 '해산토굴' [사진=플랫컴]
해산토굴에서 작업 중인 한승원 작가 [사진=플랫컴]

한승원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젊어서는 굉장히 고통스럽게 소설을 썼다.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장흥에 내려오고, 또 나이가 들면서 점차 소설을 즐기면서 쓰게 됐다”며 “몸이 안 좋더라도 소설을 쓰면 몸이 좋아진다. 즐기면서 쓰니까 몸과 마음도 즐거워진다”고 말했다. 그가 쓴 「문학이라는 병」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특히 『산돌 키우기』에는 유난히 할아버지에 대한 일화가 많다. 한승원은 “할아버지는 내 속에 하늘을 심어주려 했다”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평생 동안 내 삶을 지배하고 나를 구제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이야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구원한다. 수문해수욕장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구원의 이야기처럼.

[사진=플랫컴]

기자 : 선생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원더풀 라이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어요.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가기 전에 ‘림보’라는 역에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하나 골라야 합니다. 그러면 림보 직원들이 그 기억을 가지고 짧은 영화 한 편을 만들어주어요. 선생님이 만약에 림보에 가서 단 하나의 소중한 기억을 골라야 한다면, 어떤 기억을 고르고 싶으세요?

한승원 : 할아버지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듣던 순간입니다. 할아버지가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의 힘이 내 삶을 지탱하게 해주었어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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