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어쩌면 가장 반짝이는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어쩌면 가장 반짝이는
  • 스미레
  • 승인 2021.08.11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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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방학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어?”

그건 ‘왜 교사가 되고 싶냐’는 내 질문에 대한 선배의 답이었다. 나도 그와 같은 과에 다니고 있었지만,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늦은 감도 없잖았다. 나는 이제껏 도서관에서 시집이나 팔랑이던 한량이었는 걸. 모두가 고시 모드에 돌입할 즈음에야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왜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꼼짝할 수 없었다. 우리 중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그녀라면 좋은 답을 줄지도 몰라. 기대하며 그렇게 물었다. 비록‘방학’이란 답에 맥이 풀리고 말았지만. 대학생이던 그때까지도 나는 방학이 별로였다. 방학이면 가없이 늘어지거나 이리저리 바빠져야 하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내겐 교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 내게 여름 방학은 특히 무서운 것이었다. 세상 모든 여름이 그토록 신난다는데 내 여름은 침착하기만 했다. 게다가 여름이면, 아마도 더 낮아지는 혈압 탓에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멍하니 어지러웠다. 그런 나를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책뿐이었다. 여름에, 기나긴 방학에, 나는 모로 누워 작은 아씨들이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읽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읽느라 정작 숙제로 읽어야 할 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읽어야 했지만 어쨌든 일상의 강요 밖에서 책을 읽는 건 큰 기쁨이었다. 나에겐 그 순간이 여름이자 방학이었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계곡이나 바다에 가는 건 외려 숙제처럼 번거로웠다. 어지간해선 친구들을 호출하거나 부모님께 어딜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 책을 좀 읽다 보면 친구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고, 어느새 새 계절이 눈짓을 보내왔으니까.

“나는 방학마다 여행을 떠날 거야. 너도 잘 생각해 봐. 방학 없는 삶이 어떨지.” 수험서를 그러쥔 선배가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 어쩌면 그 조용한 유년의 방학들이 나를 여기로 이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어린 나는 왜 그리 무기력했을까? 방학이란 게, 누군가에겐 직업 선택의 기준이 될 정도로 좋은 것인데 내겐 그렇질 않네. 버스에 남아 그런 생각을 하다 몇 정거장인가를 더 지나왔다. 그리곤 방학 없는 삶 쪽으로 살며시 걸음을 틀었다. 회사에 들어갔고, 가끔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뿐이었다. 아이를 낳고는 선배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그런데요, 선배. 아기가 생기면 방학도 다 끝이에요.

그리하여 또다시 방학이다. 여름이면 시들어가던 나와 달리 아이는 여름에 더욱 활기차다. 와다다다 달음질하고 꼼지락 뭔가를 만들고 새록새록 책을 읽고 영화도 보며 꽤 선선하고 괜찮은 하루를 보낸다. 엄마인 나 역시 그 곁에서 하루를 난다. 여름엔 전깃줄처럼 시간도 늘어지는 게 분명해. 그런 생각은 찬장 속 그릇들 틈에 끼워둔 채로. 할 일을 다 마쳤는데도 시간은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느리기만 한 하루다.

그렇대도 아이가 무료한 표정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날이나 먼 나라에 사는 이모가 보고 싶다 하는 날이면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만 할 때 내가 자의로 집에 있었다면 지금 아이는 타의로 여기 있는 게 아닐까. 나가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나가야 한다. 이 염천에 아무래도 무리다. 참자, 참자. 방학을 내 뜻대로 누려 본 내가 조금 더 너그럽자. 자꾸만 다짐하는 이유다. 금세 또 어지럽혀질 집안을 단정히 돌이키고 아이의 고집과 투정을 참다 화를 내고 자책도 하며 지금의 나로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지친다. 더위에 지치고 서두르려는 마음에 지친다. 가을이 오긴 올까, 오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꼽아보게 되는 것이다.

엊그제도 그랬다. 밤 내 뒤척이다 동틀 무렵 털고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데 아이가 따라 나왔다. 막 일어난 얼굴치곤 방싯방싯 참 예쁘게도 웃고 있기에 물었다. “좋은 꿈 꿨니? 우리 아가 웃고 있네.”“아아니, 그냥 좋아서요. 방학이잖아! 오늘이 아직 많이 남았어.”

아이는 오이꽃처럼 노랗게 밝아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달콤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이 여름이, 긴 방학이 언제 끝날까 손가락을 꼽는 대신 아이의 매일을 축하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 이 얼마나 꿈 같은 일이야. 얼마나 축복할 만한 일이야. 자라나는 한 사람의 앞에 이 뜨거운 계절이, 일 년의 한중간이, 통째로 펼쳐져 있다는 게. 이제 막 태어난 오늘이 고 작은 손안에 고스란히 쥐어져 있다는 게. 아이는 지금 쭉 달려보고픈 멋진 대로를 만난 심정이 아닐까. 소년의 눈앞에 놓인 것은 여름 방학. 생애 단 한 번뿐인, 열 살의 여름, 방학.

그 마음에 기대어 방학의 설렘을 엿본다. 어린 날 아쉬운 줄 모르고 흘려보내던 단어를 주머니에 넣고 기쁘게 만지작거린다. 종종 휘파람 불 듯 불러 보기도 한다. -여름 방학-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귀여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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