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저는 이 일대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자칼입니다. 제가 아직 이곳에서 당신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니 기쁘군요. 사실 저는 희망을 거의 포기했지요. 왜냐면 우린 당신을 무한히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내 어머니가 기다렸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기다렸으며,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모든 자칼의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것을 믿어주십시오.” <24쪽>
바로 그 순간, 흐르는 물살을 거스르며 그물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아저씨의 오른쪽 손목이 어깨 위까지 튀어 오를 듯 움직였다. 이어서 내가 아까 흘낏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 아저씨의 손에 잡혔다. 그 물체는 검은 빗줄기 속에서 무거운 밧줄처럼 곡선을 그리며 맞은편 둑 위로 툭 떨어졌다. 나는 달려갔다. 둑 위에는 뱀 한 마리가 모가지를 한 자도 넘게 꼿꼿이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험악하게 우리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53쪽>
“사실 악이란 없지요.” 노인이 말했다. “거래하지 못할 불행은 여기 없어요.” 노인은 그의 상점에서는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절망적인 마음으로 가져간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는 하루 동안을 기다려보기는 하지만 다음 날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서는 20프랑을 내고 가져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노인은 고객들의 요구를 아주 약삭빠르게 파악하는 장사꾼으로 보였다. <111쪽>
너는 그 계집애와 천생연분이라 주장하지만 그건 내가 더 잘 안다. 계집애는 저밖에는 결코 알지 못한다. 저 하나만을 생각하고 저 하나만을 사랑한다. 나만이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나를 배반했고 사람들을 배반했고, 동네 사람들을 배반했고, 전쟁터의 다른 동료 병사들을 배반했다. 그랬음에도 나는 변함없이 너를 사랑한다. 아, 나의 부름 소리가 너한테까지 들리는지 의문이구나. 나는 늙었다. 생각도 마구 착잡하다. 너와 그 계집애의 생각으로 지쳤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보내고 있는 생각들이 그 계집애의 노랫가락들을 충분히 눌러 이길
만한 힘을 지닌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 계집애도 노랫가락들을 너에게 보내고 있을 테니까. 그 노랫자락은 독기를 품은 바람처럼 너에게 불어 닥칠 테지. 그 노래는 천하디 천하다. 그거에 비하면 내 생각들은 너무나 점잖지. 천박한 것과 만나면 점잖은 것이 지게 마련이다. <148쪽>
[정리=전진호 기자]
주수자 옮김│문학나무 펴냄│259쪽│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