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독서인권] 농아인 노경섭씨 "우리에게 한글은 제 2외국어입니다"
[특별기획-독서인권] 농아인 노경섭씨 "우리에게 한글은 제 2외국어입니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6.2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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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장애인, 독서인권을 말하다]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입니다. 지적 격차가 삶의 격차로 이어지고 교육을 매개로 한 계층 대물림이 공고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서는 삶의 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독서 소외지대에 놓여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의 독서 접근성은 비장애인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독서신문>은 국내 언론 최초로 장애인의 독서인권 문제를 취재해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시각·청각·발달장애인들의 독서 생활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법적·제도적 미비점은 무엇인지를 점검합니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고, 김예지(국민의힘), 장혜영(정의당) 의원 인터뷰를 비롯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토론회를 통해 개선점을 찾아봅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 부탁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장애없다 판단 안돼
-‘휠체어 탄 사람은 안돼’라는 말 없애는 게 사회통합
-독서는 동등한 삶 사는 데 크게 중요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인터뷰에 앞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농인, 농아인, 청각장애인...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검색을 거듭했다. 고민 끝에 청각장애인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노경섭(54)씨는 “청각장애인 중에는 듣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노인성 난청도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농아인’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부탁했다. 그때부터 청각장애가 있는 ‘농인’(聾人) 중에서도 언어장애가 있는 ‘농아인’(聾啞人)으로 호칭을 바로잡았다. 

국립중앙도서관 1층에 자리한 장애인정보누리터에서 만난 노경섭씨는 수어통역사와 함께 ‘수어대면낭독’을 하고 있었다. 수어대면낭독은 문해력이 낮은 농(아)인들에게 책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수어로 설명해주는 서비스로, 노경섭씨가 가장 애정하는 독서법이다. 다만 코로나 때문에 이용이 제한되면서 수어대면낭독을 하지 못한 것이 벌써 1년 4개월째(정부 방역 지침에 따라 지난해 2월부터 비대면 ‘묻고 답하기’로 전환), 영상을 통해 단발적으로 모르는 것만 묻다가 인터뷰를 계기로 오랜만에 직접 마주한 수어통역사와 책 『승정원의 일기』(사계절)를 읽는 노경섭씨의 얼굴은 밝게 빛났다. 

노경섭씨는 어떻게 책과 인연을 맺었고, 맺어가고 있으며, 맺어갈 예정일까? 국립장애인도서관 6층 동아리방으로 자리를 옮겨 수어통역사와 함께 인터뷰를 시작했다. 외국어 통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무지가 없었다. 통역사는 “수어는 ‘음성언어’가 아닌 ‘수(手)언어’이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어 메모조차 어려운 탓에) 순차통역보다 동시통역이 편하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렇게 조심을 했건만 비장애인을 뜻하는 ‘청인’이란 말에 “정상인이란 말이죠”라고 되묻는 실례를 저질렀다. 다행히 통역되기 전에 통역사가 바로잡아 주었지만 무관심에 따른 무지의 발로라는 생각에 뜨끔했다. 그런 순간을 통해 얻은 농아인에 관한, 농아인의 독서생활에 관한 이해를 공유해본다. 

- 농아인으로 살아오신 삶에 관해 여쭤봐도 될까요? 

“2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어 청각장애인이 되었어요. 이후 농인으로 자랐는데, 당시에는 농인인지, 청인(비장애인)인지 모르고, 듣는 것에 불편함 없이 살았습니다. 가족들과는 보디랭귀지로 대화를 했고,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이웃과 대화할 때는 형들(위로 형만 셋)이 수어 비슷한 동작을 만들어서 소통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배려 덕분에 어린 시절에 힘들거나 우울한 기억이 없습니다.” 

- 듣는 문제로 학습을 포함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국민(초등)학교를 부산농학교(구 부산맹아학교)에서 다녔는데, 그때는 선생님과 선후배들이 수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대학은 농아인들을 위한 학교가 없더라고요. 당시에는 수어통역서비스도 없었어요. 미국에 갈로뎃 대학이라는 농인대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학비가 부담이 되더라고요. 먼저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죠. 그런데 막상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니 비자 문제 등 규정이 깐깐하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틀어서 캐나다로 갔어요.” 

노경섭씨 [사진=안경선 PD]

-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나요?

“옷 디자인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29세에 결혼해서 아내가 있었는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죠. 영어와 미국 수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캐나다로 떠났어요.”

- 미국 수어가 따로 있나요?

“네. 수어는 언어마다 다 달라요. 영어권에 가려면 영어 수어를 다시 배워야 해요. 한글과 알파벳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요.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캐나다는 수어도 같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 60% 정도만 유사하다고 들었어요.” 

- 캐나다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1년 정도 유학했는데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학교에서 수어통역서비스를 제공했기에 학교 공부에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지금은 한국에도 그런 서비스가 있지만 당시에는 생전 처음 접하는 경험이어서 무척 놀랐어요. 한국에서는 ‘장애인은 안 된다’라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차별 없는 캐나다에 가서 부정이 긍정으로 뒤바뀌었어요.” 

- 책을 읽는데 불편하신 점도 있으실 것 같아요. 

“책 내용을 깊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요. ‘수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농아인에게 한글은 제2 외국어나 마찬가지예요.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뜻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데 사전을 찾아봐도 글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요. 수어통역사의 요약설명을 듣고 읽으면 그나마 나은데 그렇지 않으면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제 경우에는 수어통역사에게 단어의 의미를 들으면 그냥 외워버렸어요. 이해력이 늘어가면서 차츰 스트레스도 줄어가고 있어요.”

- 독서 생활이 궁금합니다. 주로 어떤 책을 읽고, 책 정보는 어떻게 얻는지, 어떤 방법으로 독서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역사책 그중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을 좋아해서 많이 읽고 있어요. 2018년부터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책을 읽지 않고 역사를 설명할 때는 어려웠지만 책을 읽고 나서 해보니 효과가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에요. 그때부터 역사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요. 책은 주로 국립장애인도서관을 방문해서 대면낭독서비스를 통해 읽어요. 일 년에 15권정도 읽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탈무드』를 좋아해요. 지혜도 쌓고 사고력도 늘리고 감동도 가득 담겨 있어요.”

[사진=안경선 PD]

-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보통 청각장애인분들이 선호하는 도서가 있을까요? 수어책이 편중되게 출간되지는 않나요? 

“딱히 선호하는 책이 있는 건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취향 따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르거든요. 과거에는 책들 중에 극히 일부만 변환되어 불편이 컸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수어영상도서는 정말 큰 도움이 돼요. 극장에 외국영화를 보러 갈 때 자막 없으면 못 보잖아요, 그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셨는지.

“사실 농아인이 책 읽는데 어려움이 있다 보니 많은 분들이 독서를 좋아하시지 않아요. 단어 의미를 몰라 읽다가 화를 내는 경우도 많고요. 근데 개인적으로 저는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통역사를 통해 들으니 정말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책을 읽고 해석하는 게 너무 편해졌어요. 2011년부터 10년간 거의 매일 국립장애인도서관을 찾고 있는데, 요즘 코로나로 이용이 제한되다 보니 너무 아쉬워요. 코로나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 독서와 관련해 친구들과 자주 의견을 나누는 편인가요? 

“독서왕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매일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눠요. 그 친구도 농아인이에요. 얼마 전엔 친구가 일본책 『국화와 칼』(느낌이있는책)을 읽고 수어로 설명해줬는데 그 설명을 듣고 정말 너무 즐거웠어요. 책 읽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었죠.” 

-일반 도서관이나 장애인도서관을 이용하거나 독서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고쳐졌으면 하는 대목이 있을까요? 

“(장애인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손책누리 독서프로그램에) 자주 참여하는 편이에요. 책 범위를 정해서 강사분이 설명을 해주었던 적이 있고, 강사분이 의미를 설명하고 OX 퀴즈를 냈던 적도 있어요. 책을 함께 읽고 그에 관한 경험을 나눴던 적도 있고요. 나이대를 나눠서 진행했는데, 보통 그룹당 열명정도가 참여했어요. 수업일수가 많지 않은데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사진=안경선 PD]

-전자책 등을 읽은 경험이 있나요? 

“전자책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주로 이용하는데요. 주로 책 내용을 요약한 전자책을 많이 읽습니다.” 

- 독서 보조기(음성 증폭 장치나 의사소통기기)를 쓴 적이 있나요? 

“음성을 글자로 변환해주는 ‘음성 자막 변환’ 앱을 사용한 적은 있습니다.” 

 -독서가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책을 읽기 전에는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비장애인보다 낮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농아인들과만 지내다 보면 비장애인보다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 점이 염려가 됐고, 그래서 독서란 도전에 나섰죠. 동등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은 소리로도 정보를 얻지만 농아인은 오로지 눈으로만 정보를 얻기에 정보 습득에 취약해요. 따라서 독서가 가진 힘과 영향은 무척 크다고 할 수 있어요. 독서로 삶에 만족도가 높아졌습니다.” 

- 문화해설사로 근무하시는데, 주변 청각장애인분들은 주로 어떤 직업군에 근무하세요? 

“건설업 일용직이나 공장에 다니시는 분들이 많아요. 여성분 중에는 바리스타로 일하시는 분들도 꽤 있고요. 요즘에는 택배 일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주로 육체노동 일이 많은 편이에요.” 

- 장애인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성숙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요?

“한국 사회를 완전히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제가 느낀 바로는 아직까지 차별이 많은 사회예요. 특히 캐나다에서 차별 없는 동등한 사회를 경험한 뒤로는 아직까지 차별이 잔존하는 한국 사회에 화가 나기도 했어요. 캐나다처럼 모두가 동등한 복지사회가 빨리 실현됐으면 좋겠습니다. 사회통합이란 말은 있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에요. 농인,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가 계단을 편하게 오를 수 있는, ‘휠체어 탄 사람은 안돼’라고 하지 않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진정한 사회통합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안경선 PD]

- 청각장애인을 위한 여러 지원이 있는 걸로 알아요. 어떤 게 있고, 개인적으로 이건 좋았더라, 하는 내용이 있으실까요? 

“정부 관련 뉴스에 수어통역이 나오고, 구청 업무나 KTX 표를 예매할 때 수어통역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예전보다 불편함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특히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수어통역과 청각장애인 지원 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어 만족합니다.” 

- 그럼에도 더 세심한 지원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떤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동안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수어대면낭독과 손책누리 독서프로그램을 이용하면서 정보를 얻었는데 코로나19로 이용하기가 어려워서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수영하다 물에 깊이 빠진 느낌이랄까요.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수어대면낭독 서비스 등을 가까운 도서관에서도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해 말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 연설문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할 때 수어통역을 제공해야 한다고 권고했어요. 하지만 최근 대통령 방미 연설이 수어통역이 제공되지 않아 청각장애인들의 항의가 터져 나오기도 했어요. 

“맞아요. 저 또한 같은 생각이에요. 비장애인의 경우 대통령이 연설할 때 자막을 보면 되지만 글 읽기가 어려운 농아인에게는 수어통역이 유일한 창구에요. 앞서 대통령 선거나, 지방의회 선거 당시 수어통역이 중지됐을 때는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지난해 선거 관련 행사 때 이유 없이 수어통역이 중단됐던 적이 있었어요, 청문회 때도 통역사 한 사람이 여러 후보의 통역을 맡으면서 어느 후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요.”

- 다른 장애보다 사회적 관심이나 지원이 적다는 우려도 있어요. 

“시각장애인은 애로사항이 있을 때 음성언어로 바로 표현이 가능하기에 건의해서 빠른 개선이 가능하지만, 농아인은 그렇지 못해요. 수어로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과 통역을 요청해야 하고 또 시간이 걸리는 문제로 건의가 어려워서 그런 것 같아요. 특히 농아인은 겉모습만 보고 장애가 없다고 생각하고, 책 읽는 데 문제가 없다고 오해하는 일이 많아 지원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들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자문=노경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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