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자산어보’는 왜 창대를 전면에 내세웠나
[송석주의 영화롭게] ‘자산어보’는 왜 창대를 전면에 내세웠나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5.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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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정약전(설경구 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갑니다. 정약전은 그곳에서 창대(변요한 분)라는 인물을 만나고, 그와 『자산어보』를 편찬합니다. 알려진 대로 『자산어보』는 각종 해양생물에 관한 정보를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해양 종합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정약전은 책 서문에 창대의 도움으로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바로 이 서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 <자산어보>를 만들었고요.

<자산어보>는 정약전보다 창대에 방점이 찍힌 영화입니다. 정약전이라는 인물과 『자산어보』라는 책은 ‘그 시절의 청춘’인 창대를 스크린으로 소환하기 위한 일종의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이준익이 만든 역사영화에 한정한다면, <자산어보>는 <사도>(2014)와 <동주>(2015), <박열>(2017)의 계보에 위치 지을 수 있는 청춘영화입니다. 이준익은 창대를 경유해서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청춘의 초상을 포착하고 있지요.

문제는 영화가 창대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앞서 열거한 이준익의 영화 속 청년들과 창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가 ‘위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창대에 관한 정보는 『자산어보』의 서문에 기술된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창대는 상대적으로 사도세자나 윤동주·송몽규, 박열과 달리 입체화할 수 있는 여지가 풍부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창대는 정약전의 울타리 안에서 갈팡질팡하는 캐릭터로 소모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창대는 가난하지만 학문에 뜻이 있는 청년입니다. 그는 흑산도에서 고기 잡는 일을 그만두고, 육지로 건너가 성리학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하려는 당찬 포부를 지닌 젊은이예요. 하지만 양반의 첩 소생인 창대는 신분의 한계로 과거시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대는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여러 가르침을 얻지만, 서학(西學)을 받아들인 스승과의 사상 충돌로 인해 흑산도를 떠납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창대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과거에 응시한 후 나주목사 밑에서 일하게 됩니다. 거기서 창대는 세상에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매겨 백성을 착취하는 부패한 관리의 탐욕을 목도합니다. 나주목사와 창대의 아버지는 그런 관리를 방관하는 사회지도층이지요. 이에 분개한 창대는 폭압적으로 세금을 매기던 한 관리를 죽음 직전에 이르게 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참형을 겨우 면한 뒤에 다시 흑산도로 돌아갑니다.

말하자면 <자산어보>는 창대를 ‘흑산도로 돌아가게 하는 영화’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창대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영화가 그렇게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오진우 평론가는 창대가 “정약전을 조명하기 위해서 기능적으로 소비”(<씨네21>, <자산어보>와 이준익의 ‘청춘 3부작’이 청춘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된다고 지적했는데, 예를 들면 영화에서 창대가 정약전이 아닌 그의 동생 정약용(류승룡 분)의 사상에 심취하도록 한 설정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실제 역사에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에도 깊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의 저술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창대가 『자산어보』보다는 『목민심서』의 삶에 천착하는 태도를 부여하면서 갈등을 촉발시켜요. 극중에서 정약전과 정약용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창대를 지나치게 코너로 몰고 가면서 스승의 사상에 일방적으로 반기를 들게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창대의 행위는 인과관계는 물론 당위성조차 부족해 보여요.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펴낸 이유는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한 조선의 각종 제도와 법령의 모순을 지적하여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소 결은 다르지만, 이는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펴낸 이유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물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산어보』는 그 무엇보다 백성들의 실제 삶에 도움을 주는 실사구시적인 서적이지요. 또한 두 인물이 서로의 책에 깊이 관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명석한 창대가 그 이치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눙치고 넘어가면서 창대로 하여금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간의 위계를 나누려합니다. 이로 인해 창대는 성리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둔갑된 후기 조선 사회의 병폐를 스크린 위로 건져 올리는 미끼 역할로 전락하고 말아요. 이후 그는 뒤늦게 스승의 가르침과 『자산어보』의 가치를 깨닫고 흑산도로 돌아갑니다. 정확히 영화에 의해 흑산도에 ‘갇히게 되는’ 거지요.

이준익은 한 인터뷰에서 “창대는 『자산어보』 속에 이름만 있다. 창작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약전은 잘못 그리면 역사왜곡이라고 해서 큰일 난다. 그래서 창작 여지가 있는 창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평자들의 지적대로, 창대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얼마간 캐릭터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게 과연 역사왜곡을 피하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창대도 분명 실존 인물이었는데 말이죠.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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