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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했던 모든 것, 그러니까 사람들, 장소들, 친구들, 기억, 음식, 고요, 평화, 온전한 정신이 모조리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의 절망과 같은 기세로 체념이 들이닥쳤다. ‘잃다’라는 동사는 동등하게 만드는 동사, 곧 혁명의 아이들이 우리에게 휘두르는 동사가 되어버렸다.<13쪽>
당시에는 아무도 지폐를 원하지 않았다. 지폐는 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뭐든 사려면 큰 돈다발이 필요했다. (…) 기름 한 병을 사려면 1백 볼리바르짜리 지폐로 탑 두 채를, 가끔 치즈 한 덩이라도 사려면 세 채를 쌓아 올려야 했다. 가치 없는 마천루, 그게 국가 화폐였다.<26쪽>
베네수엘라는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변화를 겪었다. 관으로 탑을 쌓아 밧줄로 묶은 채 운송하는 이사 트럭이 보이기 시작했고, 때로는 묶이지도 않은 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원 미상의 시신들이 비닐에 싸여 라페스테로 던져졌다. 살해당한 수백 명의 희생자가 암매장되는 곳이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아버지들이 권력을 잡으려는 첫 시도였다. 동시에 내가 기억하는 사회 불안과 붕괴의 첫 정의이기도 했다.<54쪽>
혁명의 아이들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루었다. 그들은 선 하나를 그어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믿을 만한 자와 의심스러운 자. 비난을 야기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분열이 팽배하던 사회에 또 다른 분열을 더했다.<66쪽>
[정리=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 구유 옮김 | 은행나무 펴냄 | 332쪽 |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