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조선선비역량 뽐낸 조선관리... 최부의 『표해록』
명나라에 조선선비역량 뽐낸 조선관리... 최부의 『표해록』
  • 황현탁
  • 승인 2021.05.13 15:00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 여행 ⑪]
[책으로 떠나는 여행] <독서신문>은 여행과 관광이 여의치 않은 코로나 시대에, 고전이나 여행기에서 기술된 풍광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칼럼을 연재합니다. 칼럼은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라는 여행기의 저자이며, 파키스탄, 미국, 일본, 영국에서 문화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한 황현탁씨가 맡습니다.
황현탁
황현탁

⑩ “정의로운 것은 어디를 봐도 없다”... 린지의 『아르크투루스로의 여행』
⑨ “사랑을 위해서는 불속에도 뛰어들겠다” 아이헨도르프의 『어느 건달의 방랑기』
⑧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칼을 들이밀며” - 카잔차키스 『일본중국기행』
⑦ “고종은 진보적이지만 나약하고, 민비는 지적이지만 후계 두려워해”
⑥ “조선 관리들, 중국 사대주의뿐 바깥 물정에는 관심 없어”
⑤ “사람을 파는 죄와 죽이는 죄는 다르지 않다” [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여행-혜초의 『왕오천축국전』]
④ 운명에는 겸손, 삶은 치열하게-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황현탁의 책으로 읽는 여행]
③ 속좁기로는 1등인 그리스 신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② 존 번연의 ‘꿈’속의 천국 여행 『천로역정』 
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숫자 12가 의미하는 것은 

지난 3월 말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자산어보>에는 『慈山漁譜』의 저자 정약전(설경구 분)이 한 어민의 얘기를 듣고 『표해시말』이란 책을 간행한다는 얘기가 등장한다. 그 어민은 흑산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와 중국을 거쳐 돌아왔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 1801년 신안어민 문순득이 흑산도에 들렀다가 표류하여 류큐(일본 오키나와), 중국을 거쳐 3년 만에 귀국한 사실을 정약전이 기록한 것이다. 또 1483년 제주도 정의현감인 이섬(李 暹)이 바다에서 표류하다 중국 장사진에 정박한 뒤 중국측 도움으로 귀국한 사례도 있다.

풍랑으로 표류하다 중국을 거쳐 귀국한 이 중에 최부(崔溥)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부역을 피하려 도망친 사람을 잡아들이는 업무를 수행해온 인물이다. 최부는 제주도로 파견됐고, 1488년 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고향 나주로 향했으나 풍랑을 만나 표류한 뒤 중국 저장성에 표착하여 항주, 남경, 북경,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게 된다. 그가 귀국한 후 성종의 어명으로 표류에서부터 중국의 역참제도·기후·산천·도로·관아·풍속 등 견문한 것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하멜표류기』가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하다 조선에 거류하면서 겪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면, 『표해록』은 조선 관리가 표류하다 중국에 상륙한 후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겪고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진=국립제주박물관]
[사진=국립제주박물관]

최부는 일기가 불순하므로 출발을 미루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수행원인 아전, 군인, 종 등 42명과 함께 홍치원년(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1488년 윤정월 3일 제주를 출발한다. 풍랑을 만나 며칠을 망망대해에서 쌀을 씹고 오줌과 빗물로 연명하던 중 저장성 영파부(寜波府) 하산이란 곳에서 중국인 강도를 만나 인장과 마패를 제외하고는 모두 빼앗긴다. 강도들이 노와 닻을 잘라버리고 떠나 다시 표류하다 저장성 우두외양(台州府 臨海縣 牛頭 外洋)에 정박한 후 마을 사람들에 이끌려 다니다, ‘왜(倭)가 국경을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고 온 군리를 만난다. 지친 몸으로 끌려가다시피 해 해양경찰 기능을 하는 도저소(桃渚所)까지 가 심문을 받게 된다.

심문 과정에서 최부 일행은 조선의 관리이며 풍랑으로 인한 표류가 인정되고 그 내용이 북경 황실에까지 보고된다. 이후의 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며, 표류 사실이 양국을 왕래하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 알려진다. 6월 4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에 도착한 최 부는 성종의 어명으로 『표해록』을 저술한 뒤 고향으로 가 3년 상을 치르는 중 다시 모친상을 당해 4년 상을 치른다. 훗날 상중에 저술했다는 것이 빌미가 돼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중국 사신으로 다녀왔음에도 견문기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결국 『표해록』 때문에 유배를 가고 처형되었다.

최부가 중국측으로부터 조선과 관련해 받은 질문은 ‘불교가 있는가’(항주에 고려사가 있음)에서부터 상례와 가리는 음식, 관리들의 서대(犀帶)제도, 금은 채굴 여부, 주부군현 제도와 군량미, 의관과 예악, 일본 및 류큐와의 교류, 대중 조공 여부와 연호(중국연호사용), 조선의 연혁(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이 된 내력), 기자조선(위만이 축출해 마한으로 도망, 소멸)과 풍속, 제사, 사상, 병제, 의관 제도, 과거제도, 서거정의 거취, 수와 당을 물리칠 수 있었던 원인,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의 명단, 학교, 역법 등 실로 광범위하다.

『표해록』의 내용 중 지나친 중화 사대 의식은 거부감이 느껴지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명나라의 관리들을 감복시키고 조선 선비의 자존감을 뽐낸 최 부의 해박한 지식과 공직자로서 국리민복을 위한 외국 제도의 탐구 등은 책의 성가를 높여주고 있다.

최 부 일행은 모두 43명인데, 망망대해에서 13일을 표류하고 강도를 만나기도 하였으며, 136일 동안의 중국대륙 여정에서 한명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 다만, 그 자신은 5월 5일부터 17일까지 두통을 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표류할 당시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뤄 미뤄 관록이나 지위로 수행원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통솔력으로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발 첫날에는 목사가 수행토록 한 격군들에게 노를 젓도록 명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초란도에 이르렀고, 다시 흑산도(추정)를 지나자 ‘죽을 것인데 수리해서 무엇하냐’며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표류할 때 진정성을 갖고 수행원 설득에 나섰다. 나를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니 배를 수리하고 물을 퍼내자고 호소하고, 개인 수행원이 앞장서 노력하자 군인들이 ‘감복하고’ 죽을힘을 내었다. 또 죄 없는 40여명을 살려달라고 빌자 모두가 통곡하고 함께 빌었다. 제주도가 원나라에 조공 바칠 때 7일이 걸렸다는 점을 상기하고 중국 경계가 가까울 것이니 해야 할 일을 하자고 호소한다. 배가 부서지지도 않았고 키도 있으니 침몰하지 않도록 물을 퍼내도록 명령한다. 중국 지리서 『우공』을 언급하며 바다에서 수일이 지났으니 중국이 가까울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준다. 갈매기와 가마우지가 나는 것을 보고 육지가 가까움을 기뻐했으나 다시 표류하자 배 안의 귤과 청주를 찾아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기 때문에 갈증을 달래는 데만 이용토록 명한다. 보관해두었던 옷을 빗물에 젖게 해 짜 숟가락으로 떠 넣어 목을 축이게 한다. 섬에 당도해 밥을 지으려 하자 ‘오장이 말라붙은 데 밥을 먹으면 죽게 되니 장국을 마신 뒤 죽을 먹어야 한다’며 죽을 쑤어 먹도록 했다.

중국 해안에 도착해 강도를 만나자 적대하자는 수행원들의 의견과 달리, 모든 것을 주고 목숨만 구걸하자고 하여 매를 맞고 닻과 노, 줄을 끊어 바다에 던져져 다시 표류하게 된다. 광주와 나주의 사당에 제를 올리지 않고 출발하여 풍랑에 휩쓸렸다고 비난받자, 산천에 제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고, 제를 지내도 많은 배가 표류, 침몰하지 않느냐고 설득한다. 도적을 만난 후 많은 수행원이 삶의 의지를 상실하는데, 직접 물을 퍼내자 다른 수행원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육지에 정박한 후에는 엄격히 위계를 지키도록 하고, 중국인에게는 예를 다하도록 하면서 관가에 알려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본 중국인들이 ‘예의지국’임을 목도하고 미음, 차, 술을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이 ‘사나운 적’ ‘왜인’으로 알고 발이 붓고 지친 일행을 도저소로 사납게 몰아붙인다. 도중에 관리를 만나 ‘조선 관리’임을 말하자,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나 양민과 접촉할 수 없도록 재촉하여 업히기도 하면서 간신히 도저소에 도착, 스님으로부터 심문받게 될 것임을 듣는다. 심문 과정에서 배를 댄 곳이 바로 왜인 감시구역으로 ‘왜선 열네 척이 변경을 침범해 사람들을 위협했다’는 보고를 해, 배를 두고 상륙하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음을 알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공을 세우려 허위보고를 한 것이다.

북경을 지난 후 수행원들은 무사 귀국할 수 있게 되자 최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는 곳마다 공경해 대접해주고 배불리 먹게 해 주었으며, 황제가 상을 주고 관청에서 선물을 주어 빈손으로 왔다가 무거운 짐을 갖고 귀국하는 세 가지 행운을 누렸다고 감사해한다. 그는 “성상께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성실함으로 대국을 섬긴 은덕 때문”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가 조선(선비)의 자긍심, 자존심을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사서오경, 시문, 중국의 역사뿐 아니라 양국 간 교류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춰 중국 관리나 문인들을 꼼짝 못 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존경하도록 하였으며, 그런 사실이 알려져 여정 도중에 후한 대접을 받고, 심지어 사신이 아님에도 황제를 알현하고 선물까지 받는다.

도저소 심문에서 ‘글은 같은데 말이 다르냐?’는 질문에, 최부는 “1,000리 떨어지면 풍습이 달라지고, 100리 떨어지면 습속이 달라지오. 족하에게 내 말이 괴상하게 들리지만, 내게도 족하의 말이 이상하게 들리니 풍습과 습속 때문이오. 나의 성정도 요순·공자·안연의 성정이오. 어찌 말소리가 다르다고 탓하시오”라거나, 주문공의 『가례』를 아느냐, 시를 짓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답한다. 심문관이 ‘자초지종을 물은 것은 당신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의 산이나, 강, 지명을 거명하며 여정까지 문의하니 그를 다시 보게 된다. 심문 후 “조공을 해왔고 군신 간의 우호가 있어 침범이나 반역의 뜻이 없으니, 예로서 대접하고 북경으로 보내 귀국토록 한다”는 얘기를 듣고 감사의 시를 지어 절하자, 그는 ‘절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일어나 답례했다고 적고 있다. 국왕의 성과 휘를 묻자, 신하가 국경을 넘었다고 임금의 휘를 남에게 말할 수 없다고 하자 책임자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출발을 전송하겠으며, 소지 품목을 적으면 도중에 잃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최부와 아전은 가마를 타고 출발하면서, 관대함과 후대로 접대, 전별한 데 대해 최고의 예를 표한다. 물건을 빼앗긴 마을을 지날 때 주민을 국문해 최부의 말안장은 찾아 돌려받고 나머지는 찾지 못했다. 도중에 급제한 관리가 과시하자, 최 부는 자신은 두 번 급제하였다고 하면서 “족하가 내게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급제 명단을 보여주자, 관리는 “제가 미치지 못할 것 같다”고 한풀 꺾인다.

소흥부 총병관에서의 재조사 시 심문 후 중국의 산천을 넣어 감사의 시를 읊자 양식을 넉넉하게 준다, 사서오경 어느 것을 물어도 척척박사여서 “그대는 정말 글 읽는 선비다. 이곳 사람들은 모른다”고 감탄한다. 항주에서는 중국 사신이 조선 방문 후 지은 『황화집』을 아느냐고 질문하자, 그 책에 수록된 시를 낭송하는데, 묻는 자가 자신이 그의 조카라고 한다. 시를 써 달라는 사람에게는 시를 팔아 값을 받는 것이므로 사양한다. 중국의 지리, 역사, 관직, 인물에 정통한데, 소흥부는 월나라 옛 도읍, 난정은 왕희지가 수계하던 곳, 백낙천의 시에 등장하는 곳, 소동파가 지은 비문, 그의 시에 등장하는 곳, 그가 쌓은 방죽이 항주에 있고, 소주는 오왕이 오자서를 시켜 축성한 도읍지 등등 사서오경 뿐 아니라 시문, 역사에도 통달해 있다.

체류 한 달도 안 되어 최 부에 대한 소식이 알려져 항주를 지난 후 어떤 이는 호송 책임자를 통해 “공이 훌륭한 선비라는 말을 들었는데, 옥 같은 발걸음을 옮겨 한 번 만나기를 원한다, 그대는 예의지국의 좋은 사람이라 우리 여러 대인이 그대를 존경하오”라고 하거나, 호송관리가 작별하면서 “노정을 따라오며 거듭 돌보아 주심을 입었습니다” “1,000여 리 길을 따라오면서 사모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소”라고 존경을 표한다. 상중임을 들어 황제알현을 거부하자 예부에서 “부친상은 가볍고 천자의 은혜가 무거우니 사은 숙배하는 예절은 그만둘 수 없다”고 하여 비단옷을 입고 사모를 쓰고 알현한다.(4월20일).

알현 후 그는 수행원들에게 “황제께서 상을 주신 것은 우리 임금께서 대국을 섬긴 은덕 때문임으로 잊지 말고 황제께서 내린 것을 팔아 남의 소유로 넘기지 말며, 대대로 보물로 보관하라”고 명한다.

세 번째가 최부의 공직자 의식이다. 심문 과정에서 관인과 마패, 관대를 보여주어 조선의 관리임이 증명되자, 모든 백관에게 호패와 석패를 지급하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에게도 호패를 지급하며, 제주도에 통역을 상주토록 하여 왕명을 받들거나 공무출장 때 동행토록 하는 내용을 제안한다. 운하이용 시스템인 포(浦), 참(站), 역(驛), 체운소(遞運所)를 공무 수행자들이 이용하는 제도에도 관심을 가진다. 친왕이 도읍에 있으면 걱정을 끼치므로 60세 이상은 왕으로 봉해 지방으로 보내는 제도를 기술하고, 관개사업의 호율성을 높이고자 호송관에게 ‘수차’에 대해 문의하니 모른다고 하자, 연구해 알려줄 것을 요청한다. 발로 움직이는 것, 손으로 움직이는 것이 있으며, 나무의 재질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한다. 나중에 어명으로 보급한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중국은 부모의 나라’ ‘대국의 경계에 도착했다’, 심문 과정에서 “하늘에 두 해가 없으니 어찌 한 하늘에 두 황제가 있겠소. 우리 왕은 성심으로 사대를 할 뿐이오” “천자의 조정을 각별하게 섬겨 조공 바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대국의 두터운 은혜 덕에 귀향’, 우리나라와 대국은 한집안, 관복은 중화의 제복을 따른다는 등, 황제나 대국의 은혜를 언급하거나, 명은 천자의 나라라는 ‘사대의식’이 뼛속까지 자리 잡고 있는 점이 거슬렸다.

『표해록』에는 천진을 지난 후 ‘큰 바람이 불어 모래 먼지가 하늘 가득 차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북경을 지나서도 ‘땅에는 모래흙이 날아올라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 당시에도 황사가 발생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