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04.2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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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문학이란 높은 산 앞에서 늘 서성였다. 어느 날 문학이라는 높은 산봉우리를 마냥 올려만 보다가 또 다른 문학의 성채(城砦)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수필문학에 비평의 눈을 돌리는 외도(?)를 슬그머니 저지른 게 그것이다. 작자의 사상과 철학,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조, 사유로 삶을 통찰하여 자신의 체험을 고백적 토로로 작품을 꾸리는 게 특성인 수필이다. 무형식인 듯하면서도 엄연히 형식이 두드러진 문학 작품이 수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평은 어렵고도 난해한 일에 가깝다. 이십육년 가까이 수필을 써오다가 수년 전부터 수필에 대한 평설을 쓰기까진 그동안 문불가점(文不加點)으로 써 온 수필 작품에 대한 나 자신의 성찰이었다. 이렇게 써 온 수필 평론을 2015년 한 권의 평론집으로 발간 한 후, 틈틈이 수필 문학에 대한 평설을 집필해 왔다. 자연 이런 형국이니 문학적 제자도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수년 전 일이다. 지인의 간청을 못 이겨 주부 몇몇을 모아놓고 문학 강의를 하였다. 그 때 열댓 명의 수강생 중 유독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다. 항상 뒷좌석에 홀로 앉아서 빛나는 눈빛으로 나의 강의를 경청하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다른 수강생들과 쉽사리 어울리지도 않고 늘 혼자였다. 몇 달간의 수필 작법 시간이 끝나고 실전인 수필 창작 시간일 때 일이다. 비로소 몇 편의 수필 작품을 통하여 그녀의 어려운 처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만약 나의 강의가 수필 문학이 아닌 다른 문학 장르였다면 자칫 간과할 수 있을 뻔한 개인사였다. 수필 문학은 허구가 아닌 수필을 쓰는 작자가 주체가 되어서 자신의 심적 나상(心的裸像)을 오롯이 드러내는 특질을 지녀서 더욱 그러했다.

여인은 오른쪽 팔을 어려서 사고로 잃은 장애를 지녀 의족을 착용했다고 글에 썼다. 스물세 살에 한 남성과 사랑에 빠져 어렵사리 결혼을 했으나 그 행복도 잠시, 남편이 딴 여인과 눈이 맞아 아이 셋을 낳고 원치 않는 이혼을 했단다. 이때 병든 시어머니도 자신이 모시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됐다. 남편이 가정을 떠나자 어린 자식들과 병든 시어머니 생계를 위하여 노점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단다. 겨울철 혹한에 언 발을 구르며 붕어빵을 구워 파는 고통도 그러려니와 무엇보다 시어머니 병원비가 생활비 절반은 넘게 든다고 그녀는 수필 속에서 토로했다. 그래도 자신을 친딸처럼 믿고 의지하는 시어머니가 딱하고 불쌍하다며 병원비가 조금치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인의 글을 읽던 중 나는 울컥 가슴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멀쩡한 몸으로 와서 손자들을 봐준다고 하여도 시부모 모시기를 꺼려하는 세태 아닌가. 하물며 남편마저도 자신을 저버리고 곁을 떠난 상태에서 더구나 시어머니를 그토록 진심으로 극진히 모시다니, 그것도 성치 않은 외팔로 붕어빵 장사를 하여 궁핍한 삶을 이어가는 형편 아닌가. 그런 그녀가 스승의 날이라며 볼펜을 한 다스 내게 선물로 사왔다. 볼펜이 든 상자 속엔 흰 백지에 연필로 꾹 꾹 눌러쓴 편지 한 장이 또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안겨줬다. “저는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선생님의 문학 강의를 듣는 순간이 요즘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을 만난 게 제겐 큰 행운입니다. 선생님의 자상한 지도로 글을 쓰면서 무한정 삶의 애환과 아픔을 받아주는 백지의 여백을 통하여 제가 다시금 태어난 기분입니다. 선생님과의 귀한 인연을 언제까지 간직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선물이다 할 가치조차 없는 볼펜이지만, 제 마음을 담았습니다. 약소하여 죄송합니다”라는 게 요즘도 가끔 꺼내보는 그녀 편지의 전문(全文)이다. 당시 볼펜을 받아들고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자꾸만 벅차오르는 감동 때문에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린 삶을 살며 인간관계에서 선물이란 물질을 통하여 상대방에게 평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어떤 경우는 선물이라고 보내온 게 가격 고하를 따지기에 앞서서 너무 조악하고 볼품없어 선물로서 그 가치를 상실한 경우도 있다. 차라리 이런 선물은 아니 하니만 못하다.

하지만 여인의 선물은 그 가치가 달랐다. 그녀의 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속 깊이 지녔다는 사실도 잘 안다. 다만 너무나 집안 살림이 어렵다보니, 그녀에겐 단 돈 천원도 만원 맞잡이로 쓰인다는 것을 어찌 내가 모르랴. 여인이 건네준 볼펜을 들고 나 역시 그녀의 진심어린 마음이 그것에 전부 깃든 듯하여 한동안 가슴에 품기조차 했다. 심지어 이 세상 어느 비싼 가격의 선물보다 소중하다는 생각마저 들어서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기까지 했다.

여인은 이년 여 내게 수필 공부를 한 후, 어느 날 돌연 소식이 끊겼다. 수소문을 해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작년 겨울, 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시어머니는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어느 늙수구레 한 홀아비를 만나 재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애를 지닌 몸으로 그것도 아이 셋을 키우며 여자 혼자 산다는 일이 말처럼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인의 이름 석 자를 입안으로 가만히 부르노라면 그녀에게 받은 지난날 감흥 탓인지 나도 모르게 시린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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