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노숙자 할머니와 난민 소년의 동행… ‘파리의 별빛 아래’
[송석주의 영화롭게] 노숙자 할머니와 난민 소년의 동행… ‘파리의 별빛 아래’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4.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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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의 별빛 아래> 스틸컷

클로스 드렉셀 감독의 <파리의 별빛 아래>는 노숙자 할머니와 난민 소년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로드무비입니다.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크리스틴(카트린 프로) 앞에 어느 날 강제추방 과정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프리카 소년 술리(마하마두 야파)가 나타납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크리스틴은 자꾸만 자신을 따라오는 술리를 멀리 하지요. 하지만 술리의 딱한 처지에 마음이 흔들린 크리스틴은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기로 결심합니다.

영화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웃음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엄이 묻어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 크리스틴은 그저 파리의 길 위를 전전하는 남루한 노숙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배급받은 빵을 길고양이와 나눌 줄 알고, 새들과 휘파람으로 교감하며, 쓰레기통에 버려진 천문학 잡지를 읽는 등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킬 줄 아는 건강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에요.

자존의 가치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크리스틴은 불법 이민으로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술리를 따뜻하게 보살핍니다. 술리에 대한 크리스틴의 보살핌은 시혜적 차원의 보호라기보다는 낯선 땅에 떨어진 아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감각과 의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훈육에 가까워요. 영화는 이 과정에서 인종과 젠더의 위계를 허물며 진정한 연대와 공존이란 무엇인지 윤리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천문학 잡지를 탐독하는 크리스틴은 자신과 술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준 흑인 남성에게 뉴턴의 법칙 중 하나인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중력은 두 물체가 지닌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이 법칙의 핵심은,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힘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제대로 느낄 수 없을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크리스틴과 술리가 만난 것도, 술리가 다시 엄마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했기 때문일까요? 영화의 마지막, 추방 직전의 상황에 놓인 술리의 엄마를 크리스틴이 발견하고, 그는 세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보안문을 이마로 찧습니다. 보안문이 열리자 술리는 엄마에게로 달려가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틴의 눈가에는 눈물이, 이마에는 피가 맺혀 있습니다.

크리스틴이 두 모자의 재회에 이토록 헌신한 이유는 과거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자신의 아픈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틴이 술리에게 쏟은 시간과 노력과 눈물과 피를 ‘유사 출산’ 과정에 빗댈 수 있을 거예요. 출산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이를 낳는 실체적 행위를 넘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관념적 행위까지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파리의 별빛 아래> 스틸컷

끝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영화가 술리의 대사를 자막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술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영화 내내 알 수 없습니다. 그건 크리스틴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다가 영화는 술리가 본인의 의지로 내뱉은 첫 불어 대사를 번역하는데, 그 말은 바로 “메시(merci, 고맙습니다)”입니다. 엄마를 만나기 직전에 자신에게 새 옷을 입히고, 얼굴을 닦아주며, 머리를 빗겨주는 크리스틴에게 술리는 “고맙다”고 말합니다.

아프리카 소년이 당연히 불어를 알 리가 없잖아요? 어린 소년은 이 말을 크리스틴에게 하기 위해서 카메라가 보고 있지 않은 순간에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이 불어로 무엇인지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파리의 별빛 아래>는 고마운 영화입니다. 네가 나에게 와주어서, 고단한 서로의 인생에 고마운 기억 하나 만들어주어서 무척이나 고마운 영화. 영화 속 대사처럼 “희귀한 콤비”인 두 사람의 삶에 앞으로 고마운 기억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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