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대한민국] 김종관 “어둠을 통해 빛을 말하고 싶었다”
[책 읽는 대한민국] 김종관 “어둠을 통해 빛을 말하고 싶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3.26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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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 [사진=국외자들]

김종관의 영화에서 공간은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다. 그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공간을 새롭게 공간화하는 재능이 있다. 그의 카메라는 세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듯한 공간에 시간을 부여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관찰한다. 낡고 버려진 공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이는 기교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섬세한 관찰자의 태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의 신작 <아무도 없는 곳>은 소설가 ‘창석’이 서울의 여러 공간을 거닐며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영화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이어진다. 카메라는 사람들의 상처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창석을 조용히 따라간다. 김종관은 창석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어둠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자만이 삶과 빛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절망의 이미지로 희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셈이다.

이번 영화에서 김종관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마음의 공간을 스크린 위로 길어 올린다. 그는 상실과 결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듣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자세라고 말한다. 그 자세를 그가 쓴 책의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절대로 불은 끄지 말 것”이 아닐까. 봄볕이 쏟아지는 아트나인 야외 테라스에서 그를 만났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스틸컷

-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소설가 ‘창석’이 공간을 옮겨가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흘러가는 영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다’는 상태인데,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힘들다는 거다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 어떤 면에서는 관객과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 있을 때는 주로 듣는 입장인 것 같다. 창작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큰 주장이 없어서… (웃음) 성향상 기본적으로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다.”

- ‘창석’이 당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나

“둘 다 창작자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창석이 창작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데, 그 모습에는 자연스럽게 창석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곳>은 창석이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과정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창작적인 부분에서 어떤 변곡점을 만나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 저서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의 「1호선에서」라는 챕터에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섬세하게 포착돼 있다. 태생적 능력인가, 후천적 노력인가

“나는 왜 창작을 할까, 라는 생각을 불현듯 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나에게는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어떤 것들 혹은 그 순간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 그 구체적인 대상이 공간일 때가 많다. 거기에서 감화된 것들, 말하자면 특정 공간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내 생각과 감정이 변하는 순간들을 사람들에게 이미지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가령 이번 영화에 나오는 공중전화 부스 같은 공간이 그렇다. 그 공간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런 공간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

- 누군가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미지들에 주로 주목하는 것 같다. 전작인 <조제>도 그랬고,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없는 곳>은 삶과 죽음 혹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경계’이다. 이 영화의 분위기가 대체로 어둡고 쓸쓸하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삶이나 빛을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경계라는 공간이 중요했다. 지하철 안에 노인들이 쉬는 카페 바깥으로 젊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들. 옛것과 새것이 병치하고 교차하는 순간들. 그게 앞서 말한 공중전화 부스라는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새벽이라는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다.”

- 당신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시간’보다는 ‘공간’이었다. 위 책에서 “때로는 ‘어떤 공간을 남기고 싶다’라는 열망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첫 번째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썼다. 왜 하필 공간인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고, 익숙하게 보아온 공간을 영화라는 무대 위에 올리는 작업에 재미를 느꼈다. 내가 자주 갔던 공간에 다양한 인물과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질 때 무척 즐겁다. 내가 알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야 할까. 가령 종로 3가의 길거리도 낮의 풍경이 다르고, 새벽 4시의 풍경이 다르다. 이번 영화에서 그 낙차를 잡아 올리고 싶었다. 실재하는 공간이지만 그 공간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보이는 시간. 왠지 다른 사연이 숨어있을 것 같은. 아무튼 그런 작업에 재미를 느끼는데, 그게 창작의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스틸컷

- 이번 영화에도 여러 공간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관계된 공간이 있다거나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공간이 있나

“영화에 등장하는 경희궁 뒷길도 내가 자주 산책하는 공간이다. 창석을 연기한 연우진씨가 걷는 거리가 사직동, 옥인동, 통인동 일대인데, 모두 내가 자주 가고, 잘 아는 공간들이다. 이 영화에서 그 공간들을 좀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

- <아무도 없는 곳>은 창석의 ‘내면’을 담은 영화다. 그래서 창석의 현실과 꿈이 뒤엉켜 있는 비선형적인 구조의 영화로 보인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일반 관객이 따라가기에는 약간 어려운 영화 같다. ‘이렇게 보면 더 재미있다’라는 관람 포인트 같은 게 있을까

“쉽게 설명하고 안겨주는 건 없으나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갈래로 많은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각각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영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더 풍부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영화의 분위기가 전작들인 <최악의 하루>나 <더 테이블>에 비해선 다소 무겁다. 상실과 고독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소재의 영화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객들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절망감에 빠지는 게 아니라 어떤 희망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둠을 자세히 바라봐야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진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 당신이 찍은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은 주로 이야기에 집중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카메라가 찍는 것”이라는 걸 각인시켜주는 영화다. 이번 영화에서 카메라를 다룸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이나 태도가 있을까

“제일 중요했던 건 그림자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그림자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자라는 어둠 안에서 빛을 바라보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카메라로 일상의 그림자들을 포착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그게 이전 작품들과 가장 차별화된 지점이 아닐까 싶다.”

- <더 테이블>이 네 인연의 일상을 어느 카페의 한 테이블에 올려놓은 영화라면, 그것을 로드무비의 형태로 풀어낸 영화가 <아무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로드무비가 무엇인가

“많다. (웃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1991) 정도다. 특히 <파리 텍사스>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 역시 고독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회복과 치유를 말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다.”

- 당신이 쓴 책 중 이번 영화와 가장 닮은 책이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전적 경험과 픽션 사이를 가로지르는 듯한 형식 역시 영화의 화법과 닮았다. 두 작품 모두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애상에 잠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내가 좋아하거나 알고 있는 공간에 허구의 이야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두 작품에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나와는 전혀 다른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다. 그런 부분을 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표현하고 싶었다. 근데 그 모든 것을 개인적 경험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건 한계가 있다. 좋은 창작은 내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거기에서 어떤 인식이 생기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 것인가가 훨씬 중요하다. 그래야 다양한 창작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을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영화는 시간을 이미지로 잡아줄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내가 어느 골목에서 봤던 공중전화 부스 안에는 예전에 누군가가 전화를 하고 있었을 텐데’라는 것과 비슷하다. 나도 그 부스 안에서 수많은 얘기를 했다. 그러한 것들을 모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기본적으로 삶에 어떤 ‘결여’ 혹은 ‘상실’을 안고 있다

“창석은 본인의 상실과 고통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실과 고통을 더 잘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타인의 상처를 진심으로 공감해줄 수 있다. 그것을 잘하려면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혹은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나는 가끔 세상이 힘드니 영화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요구를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고통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영화도 필요하다. 그래야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희망을 얻을 수 있다.”

김종관 감독 [사진=국외자들]

- 앞으로 찍고 싶은 영화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나는 운이 좋게도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전부 나의 내적 동기가 먼저이고 중요한 영화들을 찍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직전에 끝난 영화가 항상 그다음 영화의 물음표가 되어서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이번 영화의 경우 나에게는 형식적 탐험의 결과물이다. 한 인물이 여러 인물을 만나면서 대화하는데, 그 과정에서 뭔가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형식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소재인데, 그런 형식에 맞는 소재가 뭐가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있다.”

- 책 작업도 계속 병행할 생각인가

“영화를 찍고 글을 쓰는 게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창작은 나가는 게 있으면 들어오는 게 있어야 지속할 수 있는데, 책을 쓰는 게 어떤 자양분이 되어서 영화 작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또 내가 기본적으로 영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나만이 할 수 있는 책 작업이 있다. 서로 도움이 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책 역시 천천히, 꾸준히 쓰고 싶다.”

김종관은 1975년생으로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더 테이블> <조제> 등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최악의 하루>로 제38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등이 있다. 신작 영화 <아무도 없는 곳>에는 배우 연우진 김상호 아이유 이주영 윤혜리 등이 출연했다.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오는 31일 개봉한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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