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죽음 자리를 도모하기 위해
최선의 죽음 자리를 도모하기 위해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3.0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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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책을 다채롭게 해석하는 전문가 서평을 비정기적으로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처음 문을 연 작품은 반비 출판사에서 출간된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로 구술생애사 최현숙 작가가 펜을 잡았습니다.
구술생애사 최현숙 작가 (글=반비 제공)
구술생애사 최현숙 작가(글=반비 제공)

순전히 개인적으로라면 내 관심은 죽음까지다. 죽음 직후부터는 의례이고, 모든 의례는 많은 속임수를 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의례를 신뢰하지 않으니 의례가 요구하는 마음과 외연을 가장하고 싶지도 않다. 아름답다느니 장엄하다느니 심지어 ‘거룩’ 어쩌고까지 하는 의례는 더욱 신뢰하지 않으며, 그것이 종교의 의례면 우선 신경질부터 난다. 슬픔이나 엄숙이 요구되는 종교 의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외연 속에 감추고 있는 갖은 이데올로기와 거래와 회칠과 억압이 빤히 보여 참고 앉아 있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별수 없이 가야 하는 자리면 도 닦는 마음으로 참고 참는다. 참고 참는 유일한 방법은 의례를 노려보며 실체를 발라내면서 의례를 주도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꼬라지를 구경하고 관찰하자는 심사를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질 땐 노트를 꺼내놓고 그들 꼬라지와 내 꼬라지를 기록하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된다.

어차피 장례와 시신의 처리나 관리는, 죽은 자와는 무관하다. 산 자들의 정서를 위한 것이고, 산 자들의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에 그치지 않고,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산 자들의 권력과 자원을 드러내는 행위다. “잘 보내드렸다”는 문장은 틀렸다. 산 자들을 위해 잘 치른 거다. 큰 부자까지는 아니었던 내 엄마의 장례식장이 그 옆 초라한 장례식장 혹은 내가 참례한 빈곤한 이들의 장례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면서 나는 분노했다. 그녀 생애 나름의 고군분투와 희로애락을 덮어버린 포장과 의례와 말들, 혈족이나 지인까지야 그렇다 치고 살아 생전 그녀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동원해 펼치는 ‘사람 노릇’으로 위장된 비즈니스. 세세한 항목들까지 일일이 구분된 등급과 가격표, 최저임금 근처의 장례노동자들, 그 뒤에서 돈을 챙기는 장례 산업.

빈곤하거나 모진 삶을 살아온 지인들의 죽음 자리와 장례에는 가능하면 참여하는 편인데, 그 죽음 외연의 어떠함이나 고난에 대한 슬픔보다는 마침내 죽음에 도달했음을 축하하는 마음이 앞선다. 드디어 끝난 거다. 생애의 개인적, 사회적 측면이야 두고두고 곱씹을 일이고, 일단 마침내 끝나 다행이다 싶다. 절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장례에서는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하는 공감이 앞선다. 홀로 죽어 뒤늦게 발견돼 구더기가 드글거리던 한 할머니의 시신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왕성하고 맹목적인 생명력을 보았다. 시체와 구더기들이 알아서 만들어가는 생태계를, 외연과 느낌을 위한 인간의 과학기술 나부랭이가 망가뜨리고 있다. 과잉된 ‘의례’ 역시 여차하면 생태와 직시를 방해하곤 한다. 가족에서도, 돈에서도 떨려난 무연고 사망자의 친구들과 빈곤운동진영이 함께 싸워 만든 단출한 공영장례야말로, 마음과 다짐들이 모인 이별의 자리다. 천호대교에서 투신한 홈리스 ‘멍치’를 보내며 혈족들의 절차에서 떨려나 아랫마을 야학 한 편에 차렸던 추모제. 그 작은 자리에서 나눈 학우들의 기억의 말과 글과 사진과 소지품들이야말로 내가 아는 최선의 죽음 자리다. 내 죽음 이후에 대해 어떤 관심이 없으면서도, 나 죽으면 딱 그렇게 좀 해달라는 미련이 남을 정도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삶이 유일한 문제이니, 삶의 끝으로서 시신이나 장례는 단호하고 단출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내 생애에 대해서는 시비가 논란되고, 필요하다면 난도질까지 당할 각오도 한다. 생애의 맥락과 의미와 한계가 산 자들에 의해 신랄하고 충실하게 재해석되기를 바란다.

여기까지는 죽음과 장례에 대한 내 ‘편협한’ 소신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이와의 이별’ 혹은 ‘죽음 이후’를 위해 각별한 의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며, 시신의 처리 방식과 관리에도 각별한 의미를 둔다. ‘문화’란 한 사회의 개인이나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죽음에 관한 문화란, 인간 생의 마지막인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산 자들이 정서와 믿음과 바람의 소산이다.

멕시코 망자의 날.
멕시코 망자의 날. [사진=(c) Carlillasa]

어릴 적부터 죽음에 대해 관심이 많던 케이틀린 도티는 대학에서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고, 이후 화장터 노동자로 일한 후 장의사를 직접 운영하는 죽음 의례의 전문가이다. 그녀의 첫 번째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이 미국 사회의 장례에 대한 문제의식의 정리라면, 두 번째 책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는 그 문제의식을 품고 대안적 장례문화를 모색하기 위해 다른 문화권의 장례문화를 관찰하고 탐색하는 문화인류학적 기록물이다. 미국을 포함한 현대사회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에 상당히 동의한다. 특히 죽음 직전까지 실버산업과 의료산업이 삶과 목숨을 붙들고 늘어지다가 죽음 순간부터는 장례 산업이 달려들어 산 자와 시신을 갈라놓은 채 적당한 외연만 갖추며 일체를 돈으로 타산하는 현재의 장례 산업에 대한 세세한 지적과 정리가 탁월하다.

볼리비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해골 '냐티타'
볼리비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해골 '냐티타' [사진=(c) Carlillasa]

나아가 미국 내 몇몇 곳에 아직 남아 있거나 혹은 새롭게 시도되는 대안적 장례문화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토라자, 멕시코 미초아칸, 스페인 바르셀로나, 일본 도쿄, 볼리비아 라파스 등에 아직 살아 있는 장례문화들에 대한 소개는, 죽음에 대한, 하여 더 근본적으로는 생에 대한 각 문화들의 시선과 태도를 잘 정리/해석하고 있다. 죽음과 시신과 장례에 관한 충실한 문화인류학적 기록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자료다. 그 세세한 내용들을 필자의 시선과 글을 통해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한다. 생태 순환 측면에서 대안적인 시신 처리 방법을 찾는 여성 과학자들의 노력이나, 남성 중심의 가톨릭 권위에 맞서 죽음 의례의 권한을 되찾아오는 볼리비아의 여성들의 장례문화는, 산업이 되어버린 대부분의 장례나 남성 중심의 유교적 바탕을 아직 남긴 채 각종 종교의 의례가 뒤섞여버리곤 하는 우리 사회 대부분의 장례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욕망하게 한다.

전 지구적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개인과 사회의 모든 영역이 그렇듯 죽음과 장례문화와 시신 처리 역시 격렬한 변화를 겪고 있고, 당장은 부닥치는 대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이 격변을 통과한 후 죽음과 장례에 대한 묵은 가치와 문화 중 무엇을 남겨 새로운 길을 찾아나갈 것인가도 저자와 독자들 사이에서 탐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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