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인은 어떻게 불행해졌는가 『쌀, 재난, 국가』
[리뷰] 한국인은 어떻게 불행해졌는가 『쌀, 재난, 국가』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2.02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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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1999년 가을 늦은 오후, 미국의 한 시골 주립대학 교내에서 키가 2m는 족히 될 할아버지 교수 토니와 마주친 저자는 몸을 깊이 구부려 “한국과 일본의 조직폭력배들이 하는” 90도 인사를 건넸다. “‘헬로’라는 말과 어울리진 않지만, 그건 내 몸에 각인된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잠시 안부를 주고받던 토니는 헤어지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도 위계를 갖고 있어. 그런데 우린 그 위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위계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모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는 밀과 벼농사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탐색한다.

밀농사 문화권에서 국가의 역할은 “야경(재산권의 보호와 감시)과 보험 수리(노령, 실업, 질병, 사고 위험에 대비한 펀드 조성)”에 집중된다. “국가에 앞서 개인이 존재하고, 그 개인들의 연대체로서 국가가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 이른바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다른 모든 것의 우위에 놓을 수 있었(다.)” 또 “거대 국가 없이도, 공동체가 생산 시스템을 꾸리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벼농사 사회에서 국가는 “생산 조직과 인프라를 책임지는 중심체”이다. “장마전선과 태풍이 집중적으로 물 폭탄을 쏟아붓는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의 사회는 씨족 및 마을 단위로 긴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작은 ‘재난대비 조직들’”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집단적으로 재난에 대처하며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아시아 생산 조직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톱니바퀴처럼 긴밀하게 움직이는 조직의 일부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벼농사가 비교에 따른 불행감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벼농사 지역은 공동노동 조직을 통해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지만 소유는 따로 하는 공동생산 - 개별 소유 시스템”으로 “모내기나 제초 작업과 같은 몇 차례의 중요한 공동노동에도 불구하고, 거름과 물의 공급은 개인의 책임이고 무엇보다 땅의 소유권이 수확물의 귀속을 결정하는 구조”라는 주장. 그러면서 “이 시스템 안에서 개인들은 서로의 수확량을, 서로의 성적을, 서로의 소득을, 서로의 직업적 성공을 수시로, 1년 열두 달, 인생 전체에 걸쳐 비교하고 평가한다. 질시는 바로 이러한 비교에서 싹튼다”며 “이 비교의 쳇바퀴 속에서 패배자는 불행해진다. 인생의 행복의 준거가 자기 내면에 있지 않고, 이웃과의 관계, 그 관계 속의 비교에 있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가 겪는 아픔의 원인을 벼농사의 역사에서 찾는 색다른 내용을 담은 책.

『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384쪽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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