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장례식이 ‘잔칫날’이 될 수 있나요?
[송석주의 영화롭게] 장례식이 ‘잔칫날’이 될 수 있나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2.27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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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록경 감독, 영화 <잔칫날> 스틸컷

‘경만’(하준)은 각종 행사에서 사회자로 일하며 근근이 밥벌이를 하는 가난한 청년입니다. 그는 여동생과 함께 몸이 불편해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경만은 일하는 도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는데, 슬픈 감정을 느낄 순간도 없이 장례 절차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용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김록경 감독의 <잔칫날>은 바로 그 난처한 상황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경만이 결정해야 하는 일은 대충 이런 거예요. 국은 육개장으로 할지 시래깃국으로 할지, 제단 장식은 생화로 할지 조화로 할지, 수의는 어떤 재질로 할지 등 실로 사사로운 것들이죠. 돈 많은 사람들에겐 그냥 제일 비싸고 좋은 것으로 하면 되는 일이지만, 한 푼이 아쉬운 경만에겐 이마저도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할 사안입니다.

김록경 감독, 영화 <잔칫날> 스틸컷

장례 도중에 경만은 소속사 사장으로부터 팔순 잔치 행사가 들어왔는데 갈 수 있겠냐는 전화를 받습니다. 그는 장례비를 벌기 위해 사장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숨기고, 행사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행사장에 도착한 경만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사별한 뒤 웃음마저 잃었다며 그녀의 웃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아들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팔순 노모 앞에서 성심을 다해 재롱을 피웁니다. 죽은 남편의 두루마기까지 입고요.

<잔칫날>은 삶과 죽음이 인간사의 일부라는 한가로운 선비의 구태의연한 교훈을 전하는 영화와는 조금 결이 다릅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남겨진 자들의 마음에 아로새긴 극도의 비애감에 방점을 찍는, 뻔한 멜로드라마의 관습으로 귀착하는 영화도 아니에요. 이 영화는 가족을 잃은 끔찍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돈 때문에 상실과 애도의 감정을 유예할 수밖에 없는 빈곤한 자들의 초상(肖像, 初喪)을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도 사실적인 에피소드로 그리고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 영화 <축제> 스틸컷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상갓집의 분위기는 <잔칫날>의 그것과 닮았어요. 문상객들은 술에 취한 채로 화투판을 벌이고, 시비가 붙어 서로에게 바락바락 고함까지 질러댑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상갓집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문상객으로 온 공무원에게 저마다의 민원을 제기하며 어서 빨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성토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고인의 죽음과 상주의 슬픔은 관심 밖인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제의(祭儀)와 놀이가 뒤엉킨 축제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의 말처럼 “축제는 일상이 정지되는 일종의 카오스적 상태”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축제는 일상에서 금시기됐던 온갖 무람없는 말과 행동이 무질서하게 틈입하고 교차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장례도 마찬가지예요. 장례식장에는 ‘애도’라는 단 하나의 질서와 풍습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남겨진 자들의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 배려와 공감 등이 이리저리 맞물려 돌아가는 한바탕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음을 다룬 두 영화의 제목이 모두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장례식장은 도처에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어둡고 음울한 장소이지만, 애도의 과정을 통해 남겨진 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는 회복의 장소이기도 해요. 이를 통해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와 건강하게 이별한 뒤 일상으로 복귀할 힘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장례의 진짜 기능은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앞날을 축원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잔칫날>과 <축제>는 삶과 죽음이 서로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척력(斥力)과 인력(引力)이 길항하는 힘으로 움직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돈의 천박함과 남루한 일상의 조각들을 아프게 들이밀고 있는 영화이지요. 한편으로는 돈과 일상을 과연 천박하고 하잘것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돈으로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들이니까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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