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독서생활] 김엄지 작가 “다시 겨울, 잊히지 않는 건 장면... 겨울장면”
[슬기로운 독서생활] 김엄지 작가 “다시 겨울, 잊히지 않는 건 장면... 겨울장면”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10.30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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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가까이하는 애서가(愛書家)는 타고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아마 어떤 계기를 통해 빠르게 혹은 서서히 독서의 재미를 알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애서가는 어떻게 책과 인연을 맺고, 관계를 쌓고, 우정을 맺어 왔는지. 그 긴 여정을 책을 쓰는 작가부터, 책을 짓는 출판편집자, 널리 알리는 북튜버, 최종 소비하는 독자까지, 여러 입을 통해 들어봅니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기억이 흐릿한 R이라는 남자. 이번 김엄지 작가의 신작 『겨울장면』에선 최근 그의 작품이 그러했듯, 주인공의 이름이 없다. 그런 사정은 다른 등장인물도 마찬가지. R에게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라는 문자를 보낸(것으로 추정되는) ‘아내’, 아내의 친한 친구인 ‘동창’, 장례식까지 참석했지만 살아있는 듯 느껴지는 ‘직장 동료’, 깎은 손톱을 “고명 삼아 얹어 먹어봐”라던 무례한 ‘직장 상사’까지 소설 속 인물은 특정되지 않은 채 뭉뚱그려져 호칭된다. 마치 빛바랜 사진 속에서 어렵게 건져낸 희미한 기억처럼...

소설은 기억과 망각,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연속성 없이 나열한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술술 읽히지만, 인과 관계 속에 공백이 많아 쏙쏙 이해되진 않는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결핍의 상황 속에서 소설은 친절한 설명 대신 곰곰이 생각해볼 거리를 제시한다. 과거 무례했던 어느 상사에 관한 기억, 혹 그 상사가 나는 아니었던가, 정녕 나는 좋은 사람이던가, 온 힘 다했던 한때의 노력이 정말 최선이었나, 통증을 줄이기 위해 내가 직시해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망가진 것들에게선 소리가 난다던데 난 어떤 소리를 듣고 또 내고 있나...

2010년 단편 소설 『돼지우리』로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당선,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김엄지 작가. 그에게 『겨울장면』이 왜,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이모저모를 물었다.

Q. 겨울의 문턱에 다다르는 시점에 『겨울장면』을 출간했다.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게 된 동기나 계기가 궁금하다.

A. 소설의 구상 자체가 여러 번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내가 쓴 인물과 쓰고 있는 나, 둘 모두에게 어디를 그렇게 헤매는지 질문하고는 했다. 쓰고 있는 나는 여전히 어떤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내 글의 모든 인물도 그러한 상태라는 답을 내렸다. 기억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의도하는바, 의도하지 않는바, 기억하는 것들 혹은 기억되는 것들에 대해서.

Q. 밀리의 서재의 ‘밀리 오리지널’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기존 출간 방식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는지.

A. 종이책의 구입처가 달라졌다는 게 가장 구별되는 점 같다. 주변 친구들에게 책이 나왔다고 말하고, 이 책은 이러이러(서점이 아닌 밀리의 서재에서 ‘밀리 오리지널 종이책’ 서비스를 신청)하게 구해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는 점. 전자책 플랫폼에 익숙하지 않아 까다롭게 느끼는 친구들도 있었고. 신기하고 신선하게 느끼는 친구들도 있었다.

Q. 책 제목이 ‘겨울장면’이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궁금하다.

A. 확신 없이 지은 제목이었는데 책으로 나온 본새를 보고 또 일독해보니, 이 소설에 이만한 제목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장면』은 제목을 맨 마지막에 지은 소설이다. 제목을 붙이기 위해서 써놓은 소설을 읽으니 더 막막했다. 잠들기 전까지 작정하고 제목을 고민했다.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는데, ‘다시 겨울이고 다만 겨울이고. 잊히지 않는 것은 장면이다’라는 생각에 『겨울장면』이라 표현하는 게 무난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제목을 지었다.

Q. 책 내용이 독자를 흡입하면서도 독자가 작품에 매몰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생각할 거리를 계속해서 제공하는 느낌이다. 또 곳곳에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는 듯도 하다.

A. 아마 철학적 사유가 곳곳에 담겨 있을 텐데, 그게 딱 짚어 어디인지, 이 문장은 이러이러한 논리의 철학에 근거했다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 같다. 소설이 된 내 글에서 ‘철학’ 혹은 ‘철학적’인 것을 해명하는 일은 불가능할 듯하다. 내게 소설이 안개나 그림자 같은 것이라면, 철학은 안개 속의 안개, 그림자 속의 그림자이다.

Q. “슬픔은 갈비뼈로 와요” “망가진 것들에서는 반드시 소리가 나요” “통증을 줄이는 방법 중에 하나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등 유독 아픔을 다루는 문장이 많은 것 같다.

A. 이 소설을 쓸 때 다치기도 자주 다치고 신체에 변화가 많았다. 수술만 세 번이었다. 사고뿐만 아니고 가정사도 피곤했다. 종국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푹 자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졌다. 몸의 고통과 정신의 고통은 서로 주고받고, 또 서로 전환점이 돼주기도 한다. 몸 때문이건 마음 때문이건, 누워 있는 상태라면, 곧잘 생각하고는 했다. 왜 괴로운가. 이 고통이 환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고 나면 한결 나아졌다. 그런 생각들이 글을 쓸 때 자연스레 문장으로 나왔다.

Q. 작품 뒤편에 짧은 에세이가 담겼다.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글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미친, 이라고 불러야 할지. 나는 이제 너를 모르겠어. (중략)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못 읽겠어. 저리 가줄래?”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작가의 내적 갈등을 드러낸 대목인가?

A. 제목이 붙지 않은 상태에서 소설을 읽고 또 읽다 보니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쓴 것이라 그런지 문장이 눈에 쏙쏙 들어오면서도, 너무 쏙쏙 들어와서 그런지 한 서너 줄을 읽지 않은 채 훌렁훌렁 넘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정말 한심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미친”이라는 말은 나를 향한 말이다. “저리 가”라는 말도 나에게 하는 말일 수 있다. 프린트해놓은 소설 뭉치를 이렇게 저렇게 보고, 이런저런 표시를 해두고, 거기에 살면서 하게 되는 메모나 낙서가 더해지고. 너덜너덜하고 두꺼운, 그대로 버리기에는 중요한 게 많이 표시된 것 같아 어디 따로 보관해야 할 것 같은데 부피가 또 꽤 되는 존재. 처치 곤란하고, 곤란한 대접이나 받는 내 소설이 안쓰럽기도 한 여러 심정이었다.

Q. 글을 쓸 때는 ‘위로’ ‘양해’ ‘얼음’ ‘다채로운 모습의 해변’ ‘다른 창’이 필요하다고 했다. ‘창작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인지? 창작활동 과정, 특별히 이번 작품을 집필할 때의 과정이 궁금하다.

A.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로 몸살이 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런 생각에 정말 글을 쓸 때면 몸살이 난다. 더 예민해져서 알레르기 반응이 쉽게 일고, 재채기, 콧물이 끊이질 않는다. 간지러워서 눈가에 살갗이 벗겨지게 눈을 비벼댄다. 아마 잠이 모자라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글을 쓸 때면 컨디션이 영 좋지 않고, 끊임없이 격려와 위로, 응원이 필요하다. 우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그렇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이 피곤할 수 있다. 『겨울장면』이 완성된 글이 되기까지 유독 변덕이 심했다. 썼다 지우기를 수없이 했다. 그간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기도 하고, 뭐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내 개인사에 사건이 생기면 쓰던 소설은 중단된다. 중단된 것을 일정 기간이 지나 다시 열어봤을 때는 그대로 지워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소설의 결이 달라지고 달라지기를 거듭하다가 아예 다른 글이 되고, 또 다른 글이 되고 또 다른 제목이 되고, 또 다른 제목의 제목이 되고...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가운데, 출판사 작가정신의 독려 덕에 책이 완성될 수 있었다. 밀리의 서재에서 김엄지 책이 나온다는 기사를 내주셨고, 기사까지 난 마당에 일을 번복할 순 없었다. 아마 그 기사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어떤 사회적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작가정신과 밀리의 서재, 내 주변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Q.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 혼자 재미있었다”라는 자기 고백의 맥락이 궁금하다.

A. 나는 주로 내가 쓰고 싶은 걸 별 어려움 없이 쭉 써 내려간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엎게 된다. 아주 다 지워버릴 때도 있고 반을 지워버릴 때도 있다. 한번은 A4 용지 다섯 장을 썼는데, 일주일 뒤에 보니 다섯 줄이 남아 있더라. 그런 반복적이고 지난한 과정을 겪다 보니,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걸 안 쓰면 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질문에 나온 문장을 쓸 당시) 카페에서 글을 쓰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저녁 9시에 카페가 문을 닫았다. 글을 마저 쓰지 못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그냥 잘 것 같아 공원으로 가 벤치에 앉았는데, 자전거 안장 위에 노트북을 얹어놓고 한글 창을 켜놓고 보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헛웃음이 났다. “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쓰고 싶은 걸 안 쓰도록) 일의 방향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글 쓰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방향까지 바꾸고 계획을 세우고, 그런 게 재미있어서 “혼자 재미있었다”라고 썼다.

Q. 무언가를 주도하지 못한다 해도 오래가는 작가, 글의 완성 순간보다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작가로 알고 있다. 그런 주관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는지? 향후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궁금하다.

A. 등단 후 올해 10년이 됐다. 10년이나 이 일을 한 거 보면, 이미 오래 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글을 쓰는 데 큰 결심이나 다짐은 없다. 너무 과하지 않은 걸 너무 흉하지 않게 세상에 내놓아야지,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다. 이번에 『겨울장면』을 썼으니 다음 소설은 『겨울짜장면』을 써보는 건 어떨까, 주위에 그런 말을 했는데, 많은 만류가 있었다(웃음). 그러나 한 편쯤 쓰고 싶다. 『겨울짜장면』. 배관 설비를 업으로 하는 주인공이 천장 안에 올라가 수리를 하다 짜장면을 먹는 뭐 그런 이야기. 실제 천장 안에 배관이 있는지 없는지, 또 왜 굳이 짜장면을 천장 속에서 먹어야만 하는지, 아직 그런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쓰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아마 단편으로 쓰면 알맞을 듯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겨울짜장면』은 세상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쓰는 동안 잠깐 재미있고, 읽는 분들도 재미있을 수 있지만, 이제 정말 쓰고 싶은 건 한 글자도 안 쓰기로 했으니까.

Q. 이번 소설 도입부에도 ‘천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혹 작가에게 천장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 존재인가?

A. 이 소설의 인물이 끊임없이 집중하는 그곳, 거기가 천장일지, 어떤 허공일지, 위인지 아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워낙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잘 구분되지 않는 소설이니까. 소설 이외에 나 개인에게 천장이란 글쎄, 뭘까? 천장은 천장이겠지. 나는 천장이 내 위로 한없이 높아지는 것 같은 공황을 겪어보기도 했고. 언젠가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요량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 윤곽을 훑어보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누구든 한 번쯤 천장에 집중해본 적 있지 않을까? 나 개인에게 천장이 그다지 큰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인물이 누워 있는 상태일 테니 거기에 맞춰 쓴 것이다.

Q. 마지막으로 소설 집필을 마친 근황이 궁금하다.

A. 요즘은 산책이나 카페에 가는 일이 내 여가의 전부이다. 코로나나 독감을 경계하면서, 건강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먹는 걸 더 신경 써서 먹으려 한다. 채소를 듬뿍 먹고 당류는 제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엄격히 하고 싶은데 마음만큼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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