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찬란한 방황의 문장들 『오라는 데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만』
[책 속 명문장] 찬란한 방황의 문장들 『오라는 데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만』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0.16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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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틀째가 되니 조금은 수월하게, 그리고 더 깔끔하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고 이번에는 멀쩡하겠거니 살펴보니 웬걸, 옷 뒤가 더러워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앞모습에만 신경쓰다, 정작 내가 챙기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고로움을 외롭게 내버려두었다. 세상은 의외로 수고롭다는 말에 인색하다. 잘했다는 칭찬보다 수고했다는 다독임이 그리워지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등에 묻은 반죽의 흔적으로 내가 겪은 희끗한 수고로움의 크기를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제야 등뒤가 보였다.<28~29쪽>

좋은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고, 위로를 주는 사람에게도 위로를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글을 쓰는 작가가 필요하다고. 좋은 사람인 형에게는 힘이 되어줄 또다른 좋은 사람이 필요할 뿐이라고. 가만히 되뇌어보니 나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었다. 한 번씩 전원을 끄고 물을 다 비워낸 다음 깨끗하게 씻어줬어야 했다.<34쪽>

“맛은 있는데, 배가 불렀나보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 있는 결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사장님은 그저 자신의 할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장님은 손님이 음식을 남겼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만든 음식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음식의 맛에는 이상이 없으니 남겨진 것에 대한 책임은 사장님의 소관이 아니었다.<44쪽>

그들은 언제나처럼 부모라는 이름의 유통기한이 지났음에도 소비기한이 있으니 자신들을 더 써먹으라 아낌없이 내어준다. 선배, 후배, 동료, 부하, 직원이라는 역할을 우리들처럼 소화해내야 하면서, 부모라는 역할은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자식새끼의 유통기한은 왜 그리도 짧고, 또 쓸모없는지. 밥을 먹고 길을 걷는 와중에도 틈틈이 자책이 밀려오는데,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직은 다른 이름의 역할들을 수행해내는 게 너무나도 벅차서 도저히 자식의 소비기한만큼 써먹으라는 기약 없는 말 따위를 할 자신이 없다.<62쪽>

먼저 잘 닦은 동그란 트레이에 종이 포일 한 장을 예쁘게 올려준 뒤 사장님이 치킨을 담으면 메뉴에 따라 갖가지 토핑을 적절한 위치에 올려준다. 예를 들면 눈꽃치킨에는 파슬리와 치즈가루를, 간장치킨에는 아몬드와 마늘튀김을 골고루 뿌려준다. 늘 그렇듯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 되고서야 이 간단한 음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담겨 있는지를 깨닫는다.<118~119쪽>

『오라는 데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만』
이수용 지음│달 펴냄│220쪽│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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