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기획] 우리가 ‘한글’에 관해 몰랐던 사실들
[한글날 기획] 우리가 ‘한글’에 관해 몰랐던 사실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0.09 0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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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오늘은 제574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이니만큼 기본으로 돌아가 보자. 우선 첫 번째 질문. “우리에게 한글은 무엇인가?” 책 『한글 민주주의』의 저자 최경봉은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기도 했고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며 “상처 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한글’에는 ‘큰’ ‘위대한’ 또는 ‘유일한’이라는 의미가 덧붙었다”며 “그만큼 한글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물이었다”고 설명한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 『세종실록』 中

두 번째 질문. “한글은 왜 탄생했나?” 책 『한글전쟁』의 저자 김흥식은 “한자에 예속된 채 살아온 우리 겨레를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다”며 세종 대에 이르러 안정기에 접어든 조선 정부가 통치 철학을 온 백성에게 널리 알려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한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종이 정말 한글이 한자를 대신할 문자라고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책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저자 최경봉은 “세종은 한 번도 한글이 한자를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글 창제 후 한글은 공식 문자로서 여러 용도로 쓰였지만 한자의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세종은 한자의 역할과 한글의 역할을 달리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의 논의처럼 세종의 업적은 역할이 다른 문자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직접 문자 창제 사업을 추진해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올 수 있다. “그럼 당시 한글이 담당했던 역할을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당시 교육의 중추였던 한문 교육에 한글은 적극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당시 한글의 기능은 한자 아래에 뜻과 소리를 한글로 기록해 한자 학습을 수월하게 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저자는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榜 : 어떤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가 트이게 됐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덧붙인다.

마지막 질문. 한글로 쓰인 현존하는 최초의 책은 무엇일까? 바로 『용비어천가』다. 우리가 한글로 쓰인 최초의 책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한글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책에는 당연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는 알려진 대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악장의 하나이다. 조선을 세우기까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사적(事跡)을 중국 고사(古事)에 비유해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노래가 바로 『용비어천가』다.

저자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목적 중 하나가 ‘일반 백성들에게 왕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림으로써 왕권을 확립하기 위함’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용비어천가』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가 한글로 쓰였다는 사실을 보면 한글이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했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용비어천가』 이후에 한글로 발간된 책으로는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있는데, 두 책 모두 불교와 관련한 서적이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서 유교 서적이 아닌 불교 서적을 한글로 먼저 번역 및 간행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 근저에는 이미 불교가 백성들의 생활에 깊숙이 뿌리내린 측면이 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소헌왕후에 대한 세종의 깊은 애정 또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해는 1446년이다. 『훈민정음해례』가 완성된 해인 것이다. 그러니 세종이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경(印經 : 불경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든 목활자)을 명했을 때는 새길 경전에 한글을 사용하겠다는 뜻이 서 있었을 것”이라며 “세종으로서는 자신이 만든 문자를 써서 추모의 정을 더 깊게 새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위 두 책은 왕이 왕비에게 보내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러브레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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